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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May 07. 2024

남편을 용서하니 생긴 일


알았어. 데리러 갈게. 전화 잘 받아. 


남편 회식이 아이 학원 근처라 아이를 데리고 남편도 픽업하기로 했다. 젊었을 때는 12시 넘은 술자리가 수타였던 남편이지만, 코로나 덕분인지 나이 덕인지 끝나는 시간이 그리 늦지 않는다. 굳이 데리러 가야 하나 싶다가도 택시 탈 것이 분명하여, 택시값을 내가 받으리라는 마음으로 가기로 했다. 


아이를 태우고 남편을 데리러 가며 전화를 했는데 안 받는다. 기분이 찜찜했지만 몇 번 더 하니 핸드폰 너머 술 냄새가 슬금슬금 새어 나온다. 아까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으니 그리로 오라고 해서, 짧은 시간이 뭐 그리 취하겠어 싶은 마음으로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남편이 있다는 그곳은 이사 가기 전 남편과 내가 즐겨가는 맥줏집이었다. 다른 동네로 이사 와서도 이곳에서 남편은 머물러 있는 걸 보니 그전에 살던 시간이 그립기도 하고, 새삼 새로운 집이 낯설기도 하다. 익숙한 창문 너머로 빼꼼히 보니 생각보다 여러 명이 앉아서 시끌벅적 떠들고 있다. 영 끝나는 분위기가 아닌데 싶은 마음으로 이쪽저쪽 각도로 다시 남편을 찾아본다. 보이는 앞모습들에는 남편이 없고 뒤통수를 보고 남편을 찾아야 하는데 잘 모르겠다. 당연히 내 손에서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 중이다. 


들어가서 남편에게 말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아래위로 내 복장을 훑어보니 설거지 하고 막 나온, 티셔츠 배 부분이 아직도 흥건히 젖어있다. 직장 동료들 앞인데 이런 복장으로 인사하기 나 스스로 좀 싫었다. 제발 받아라 받아. 전화만 받으면 해결되는 것을,  창문 밖 나는 다른 세상 사람인 양 그들 웃음 넘어 남편을 계속 찾는다.


결국 아들이 차에서 나왔다. 아빠를 찾으러 들어가 본다는 것이다. 이 순간 또 고민을 했다. 아이를 혼자 술집에 늦은 시간 들여보내기가 찜찜했다. 그것도 나는 밖에 있다면서 아이만 들여보내면 혹시나 직장 동료분들이 내가 뵙기 싫어 그런 것을 너무 눈치챌까 선뜻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 엄마, 아빠 안에 없는 거 같은데요? "


이건 무슨 소리인가. 다시 가만히 살펴보니 분위기나 연령을 봐서도 남편 동료가 아닌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당연히 남편의 그룹이라 생각하고 보다 보니, 의심조차 안 하고 그 속에서 찾기 바빴던 것이다. 문 열고 들어 갔다. 뭐라고 물어야 하나, 남편 이름을 말하기도 그렇고. 


" 사장님, 여기 혹시 아까까지 있던 손님들이 나가셨나요? "

" 네.  한 분이 종종 오시던 분 같은데 맞죠? 그분이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동료분들이 챙겨 나가셨어요."


네. 감사합니다. 

나와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혹시 몰라 아들과 함께 동네를 한두 바퀴 계속 돌아보았다. 길가에 만취 취객이 있으면 남편인가 싶어 목을 쑥 빼서 얼굴을 확인한다. 그때 첫째가 전화가 왔다. 


"어. 엄마 지금 바빠." 

" 엄마, 아빠 집에 오셨는데요?"


집에 가보니 남편이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있다. 


"어떻게 된 거야!"

"어. 택시 타고 왔지. 이제 들어와?"


그리고 또 기절이다. 나에게 픽업 오라는 말을 해 놓고는 까먹고 택시를 타고 온 것이다. 시간 허비를 많이 하고 아이도 고생을 했지만, 취해서도 집에 잘 왔으니 됐다 싶었다. 택시비를 내가 받았어야 하는데 싶은 아쉬움을 접으며.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낯선 번호에 늦은 시간. 받을까 고민하다 받아본다. 


" 손님이 핸드폰 두고 가셨어요. 그런데 다른 분이 전화 오셨길래 가져다 드린다 했더니 횡설수설 기분 나쁘게 말씀을 하셔서 제가 서울에서 분당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 


남편은 핸드폰을 두고 내렸던 것이고, 그 기사분께 부탁드려 더 어둠이 가득한 시간에 핸드폰을 받으러 나갔다 왔다. 물론 기사님이 우리 집까지 오시는 택시비는 드렸어야 했고. 택시비 좀 아껴보려 남편 데리러 갔다가, 아끼기는커녕 동네를 뒤지며 고생하고 핸드폰 택시비까지 드렸어야 하는 내 계획대로 뭐 하나 안 되는 밤이 그렇게 흘렀다. 



예전이면 남편에게 분노를 쏟았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힘든 일이 있었나,  좀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나 보다. 
내 인생 아니고, 남편 인생인데 내가 어찌 그 마음을 다 알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바라보기 시작하니, 갑자기 힘든 일 없이 그냥 기분 좋아 취한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화낼 것도 없었다. 그냥 북엇국이나 끓여주고 말았다. 남편은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눈치를 슬슬 보더니 핸드폰 찾느라 고생했다며 택시비를 얼마나 드렸냐 묻는다. 


10만 원 드렸어. 


사실 택시비는 2만 원 나왔는데, 감사해서 3만 원 드렸다. 그리고 나머지 7만 원은? 내가 전날 아껴보려 했던 택시비에 내 수고비 합친 돈이다. 당연히 남편은 기사님한테 10만 원이나 드렸냐며 펄쩍 뛰었다. 어쩌겠나 본인이 잃어버린 것을. 


나는 전날 일들이 내 계획대로 안되었지만 3가지를 얻었다. 

첫 번째는 남편을 금융치료 했다. 10만 원이라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다음부터 핸드폰은 잘 챙겨 다닐꺼라 믿어 본다.  


두 번째는 내가 원래 아껴보려 계획했던 택시비 보다 좀 더 많이 내 손에 들어왔다. 수고비로 부족하지만 남편이 부들부들 떨며 주는 그 모습을 보며, 고소함을 서비스로 누려본다. 


마지막으로 남편도 자기 인생 사나 보다 하고 바라보니, 내가 내 인생도 마음대로 못하면서 그의 인생에 뭐 그리 화낼 것 도 없었다. 오히려 남편이 나한테 애써 고마워한다. 


남편의 인생을 응원해 줬다라고 아름답게 말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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