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y수 May 16. 2024

유튜브 싫어하는 자식 낳기

새삼 나는 어떤 걸로 엄마 속을 뒤집었었나 생각해 본다.  웃긴 것이 딱히 없다. 뭔가 다 내가 잘한 것 같고, 혼내고 서운한 말 했던 엄마가 다 잘못한 것 같다. 들어왔던 섭섭한 말들은, 뜻은 안남고 감정만 남으니 긴 세월을 내 몸속 기억에 이렇게 버티고 있나 보다. 그럼 다시 생각해 본다. 엄마는 어떤 딸을 낳고 싶었을까? 




아이가 나름 중요한 시험이 있다. 학원 반배치 고사인데, 잘 못 보게 되면 1년 동안 원하는 선생님 반에 배치가 어려워 본인도 이번 시험은 잘 봐야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집에 딱 들어와 보니 오늘 저녁에 시험을 보러 갈 녀석이 유튜브를 보고 있다. 순간 너무 화가 났다. 


자. 여기서 멈춰본다. 나는 왜 화가 난 걸까? 


첫 번째, 내 기대치랑 달라서이다. 아이가 시험 전에 동동거리며 공부하기를 기대했던 나는, 기대와 다른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불편했을 것이다. 그럼 반대로 내가 기대한 대로 다 해주는 자식을 키우기를 바라는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살아보니 인생이 껍데기만 남고 허송세월을 산 것 같았다. 시간 속에 엄마 의지만 있고, 내 취향이 없다는 것을 마흔 넘어 깨닫고는, 아주 고약할 정도의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이유로는 내가 화낼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것을 내 기대대로 살아주는 자식으로는 키우고 싶지 않아서 책 읽고 강연 들으며 애쓰고 있는데, 아이가 내 기대에 어긋나게 잘하고 있는 것이다. 적고 보니 고마워할 상황인데? 


두 번째, 유튜브를 보는 타인은 게으른 사람 같이 보인다. 나는 쉴 때 유튜브부터 키면서, 아이도 남편도 유튜브보고 비슷틈히 누워있는 모습 자체가 보기 싫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나는 바쁘게 살았으니까 유튜브를 봐도 되고 같은 성씨인 그들은 열심히 안 살았다고 내가 평가 내린 것이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카메라를 돌려본 것도 아닌 나는, 그들의 인생을 이미 최선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어떤 인간이 자기 인생을, 돌아오지 않을 하루를 엉망진창 만드는 목표로 살아갈까.

그 시간은 사실 나의 인생도 아닌데, 그 인생이 쥐어주는 괴로움과 고민은 본인들이 가장 많이 했을 텐데 정작 평가는 내가 한다. 가까이 머문다는 이유로 그들보다 더 진심인 양 최선을 평가하며 진심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마치 시어머니나 친정엄마가 곁에 있다는 이유로, 나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란 말이다. 어느 엄마가 내 아이를 망치려는 마음으로 힘든 육아를 하고 사춘기를 함께 할까. 엄마는 매 순간 선택이 그 시간 속 최선임에 스스로를 믿고 한걸음 씩 나아갈 뿐인데, 주변 사람이 감히 엄마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평가를 남편과 아이들의 마음에 내린 것이다. 이건 내가 생각 자체를 바꿔야 하는 문제인 것이지, 유튜브 보고 있는 같은 성씨들 3명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난다. 화낼 이유가 1도 없다. 


세 번째, 평생 방구석에서 유튜브만 보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엄마 불안증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 빠는 아이가 잠깐 그런 시간이 있고 지나갈 수 있는데, 평생 손가락을 빠는 인간으로 살아갈까 봐 엄마는 그 순간 두렵다. 당장 정보의 바닷속에서 그 습관을 뿌리 뽑는 방법을 찾는다. 아이가 7살인데 한글을 잘 못 읽으면 평생 한글 못 읽는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이걸로 인해 아이가 계속 공부 못하고 살 것 같은 두려움에 풍덩 빠진다.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 놀라 비싼 교재를 쫓기듯이 결제하게 되는 마음 같은 것이다. 적고 보니 웃기다. 이렇게 활동적으로 살아가는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이, 방구석에서 유튜브만 보며 생을 마감할 것이라 불안을 느낀다니, 창피해서 적은 글을 지우고 싶은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이가 잘하기를 바라서 학원에 보내는 것이라, 잘하지 못할 때 실망을 할 수밖에 없다. 잘하는 아이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은 아이 스스로가 더 강할 텐데, 나는 내 눈에 차게 아웃풋이 안 나오는 아이를 보며 실망을 감추기 어렵다. 내 라이드 시간, 내 돈, 종종 거리며 싼 간식, 시험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잘 보기를 바랐던 기도까지. 미래의 성공이 마치 정해진 것처럼 기대하고 행동했었기에, 결과가 다를 때 속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가 실망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 책 같다. 인생의 괴로움은 없고 행복만 있기를 바라는 어리석음 처럼, 아이가 나에게 보람만 주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무논리의 말이다. 실망할 수 있음이 당연함을 인정하면, 예상했던 그 실망이 왔구나 하고 삼키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본다. 나는 돈을 잘 벌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나? 나는 부자가 되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아서 부자가 못 된 걸까? 아니다라고 쓰고 싶은데 너무 불편하다. 나도 돈 벌고 싶고, 부자 되고 싶은데 안 되는 거고 못하는 것 이면서 아이는 주어진 공부를 전국 1등을 목표로 잘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머리 굵어진 아이가 나에게 노력 안 해서 돈 못 버는 거니까, 유튜브도 보지 말고 열심히 돈 벌어오라고 하면 내가 설 곳이 없어진 느낌일 것 같다. 내가 아이를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덜컥 마음에 겁이 난다. 




아까 상황으로 다시 돌아온다. 공부하기를 기대했던 아이가 유튜브를 보고 있는다. 나는 그냥 

'아이가 쉬고 싶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시험공부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나 보다'라고 바라봐 주는 것이 괜찮은 존중인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바로 치고 올라오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럼 시험 망쳐서 원하는 반에 못 들어가면 어떡하지?'


다시 혼자 답을 말해본다.

'아이의 인생인데, 내가 뭘 어쩌겠나. 그 실패 또한 인생의 중요한 과정인 것을.' 

나도 수많은 실패를 겪고 지금까지 살아옴을 또 잊었나보다. 


고민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어떤 인간을 낳길 바랐던 것일까. 욕심대로라면 


원 값 톡톡히 하는 아이를 점지해 달라 기도했어야 했고, 

유튜브 싫어하는 아이를 만나게 해 달라 빌었어야 하는 것이다. 


적고 보니 다 웃기고 말도 안 되는 욕심들 뿐이다. 그냥 건강하게만 태어나라 기도했던 것이다. 그래도 안 내고 여기 폭풍 타자를 치며 적은 나를 칭찬하며 내린 결론은, 화 낼 상황이 아니 구나라 마무리 지어 본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다.



우리 엄마도 나를 보며
이런 딸을 달라 기도했었는지
스스로 많이 되묻고 화를 덮었을 것 같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