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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y수 May 28. 2024

남편의 후쿠오카 와이프

정말 혼자 있을 수 있겠어?


코로나 전에나 가봤던 일본에 드디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큰아이가 자기는 중학생이니 여행으로 결석하기 싫다며 안 가겠다고 한다. 남편 휴가를 낼 수 있는 일정은 이때 밖에 안되는데, 마침 둘째는 캠프를 떠났고 큰아이는 혼자 있겠다고 하니 둘만의 여행이 되었다.


얼마만의 남편과의 여행일까. 아이들이 어린이 집에 다닐 때쯤 친정에 맡기고 남편과 여행을 갔던 기억이 가물 거리기는 한다. 아이들이 함께 가지 않으니 여행 갈 준비는 뒷전이고 남아있는 아이가 먹을 것도 챙기고 청소도 미리 해놓는다. 덜컥 출발 아침에야 짐을 싸니, 남편이 깜짝 놀란다. 어디를 가건 일주일 전부터 트렁크를 마루에 쫙 깔아놓고 생각날 때마다 준비물을 집어넣던 내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핸드캐리 트렁크 반쪽에 내 옷가지 몇 개가 전부다. 이게 다냐는 남편의 말에


없으면 가서 사지 뭐.


이 여자 뭐지라는 눈빛을 나는 읽었다. 새삼 나도 내가 극강의 J라 생각했었기에, 이런 내 모습이 어색했다. 아침에 아이 등교 때 잘 다녀오란 말을 열 번을 한다. 아직 출발도 안 한 여행인데, 혼자 있을 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책상 위에 만약을 대비해서 비상연락망과 호텔주소를 써놓는다. 현금이 뭐가 필요하겠냐만은 봉투에 십만 원을 넣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을 알면서 하는 이런 행동은 내 불안을 낮추기 위한 나를 위한 행동이다.


비행기가 12시 출발인데, 인천공항에 10시 돼서 들어갔다. 원래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시간이다. 남편은 항상 시간에 딱 맞게 도착하는 것을 좋아해서 국제선도 빠듯하게 도착했었지만, 나는 언제나 4시간 전에 가서 여유 있게 기다리기를 선호했다. 조용히 줄 서서 기다리는 나를 보며 남편이 또 괜찮냐며 묻는다.


놓치면 안 가면 되지머.


참 희한한 일이다. 주렁주렁 손에 든 간식가방도, 긴팔옷도, 아이패드도 없이 달랑 핸드백만 들고 출국한다는 게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전부였다. 이 날따라 출국장도 한산하고 아이들 없으니 자동출국심사도 가능하여 짧은 시간에 수속이 끝났다. 비행기 탑승구 열리려면 1시간이 넘게 남아서 그동안 동반입장에 추가비용이 발생해 못썼던 라운지 무료입장 카드를 꺼내본다. 세상에 일 년에 3번이나 쓸 수 있는 쿠폰이 있는데, 지금까지 못써보았다.

오전 10시가 좀 넘었지만, 라운지에서 아침 와인 한잔을 먹어 본다. 이 얼마나 꿀 같은 맛인지 마치 긴긴 결혼식을 끝내고 떠나는 신혼여행 같다. 그동안 출장 다니는 남편이 혼자 라운지에 들려 쉬다 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다른 세상 일이었는데, 내가 이곳에 앉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흥분이 밀려온다. 이번 일본 여행을 식도락으로 콘셉트를 정했기 때문에, 라운지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없다는 차가운 이성을 발휘하여 빈속에 차갑게 들어간 한두 잔의 술에 벌써 밤 10시 포차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비행기 탑승구에 가보니 줄을 길게 섰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들고탈 짐도 없거니와 내 몸 하나만 챙기면 되니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라는 말도, 목마를 것 같으면 물을 미리 사쟈는 말도 안 해도 되고 긴팔을 챙길 필요도 없다. 비행기 에어컨에 추위를 많이 타는 스타일이지만 내가 추운 것은 참으면 되고, 사실 아침 와인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줘서 괜찮았다.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여유 있게 내려 입국심사를 각자하고 나오니, 흐린 날씨조차 비 올까 걱정이 안 되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함께라면 비 오면 아주 번거로운 일들이 많아지지만, 나는 우산을 쓰면 될 뿐이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어디가 쇼핑타운인지 물어 지도를 얻어 나왔다. 정말 여행에 대한 계획이 1도 없이 도착하여 이곳이 어디고 왜 여기에 여행 왔는지도 모르는 나에게, 호텔직원이 쥐어준 지도는 나름 유용했다. 대충 메인 거리를 확인하고, 구글맵을 켜고 걸었다.



내 손에는 여전히 작은 가방 하나고, 평소에는 아이손을 잡았을 내가 남편과 손잡을 여유 손도 생겼다. 이곳에서 꼭 보고 가야 할 것을 못 보고 간다고 해도, 내 손에 쥐어진 여유는 이미 만족스러운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걷다 보니 방향이 틀려서 몇 번을 지도와 비교해 보며 좀 멀리 돌아서 가게 되었다. 평소에 여행 가서 길을 잘못 들게 되면 아이들 다리 아플까 동동거리는 나는, 사실 걷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루종일 걸어서 여행하라고 해도 발 끝에 디뎌지는 그 땅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피부에 스치는 공기가 좋아서 기꺼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이다. 새삼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여행도, 시간도 다 잊고 오로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 있었구나 싶었다.


남편이 환율이 좋으니 쇼핑을 해보자고 하여 백화점을 몇 군데 돌았다. 분명 할인률이 크긴 했지만, 원래 비싼 건 여전히 비쌌다. 내 물건을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나는 겉도는 시간이 계속되어 나가자는 결단을 내리고,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지인이 준 유일한 꿀팁이 후쿠오카에서 식당을 갈 때는 식사시간을 피해서 가야 줄 서는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4시에 찾아갔다. 식당도 메뉴도 내 마음대로 고르고, 시원한 맥주도 마셔본다. 나도 모르게 남편한테 자꾸 묻는다.


내 마음대로 해도 돼?


물론 답이 궁금해 묻는 말은 아니다. 너무 설레어 자꾸 상황을 확인하는 혼잣말 정도라고, 남편도 이미 알고 대답도 건성으로 한다. 밥을 먹고 에너지를 충전하여 근처에 돈키호테로 간다. 그곳을 나왔을 때는 손에 아이들 선물만 가득 담겨있었다. 같이 데리고 오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같이 안 와줘서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은 선물 같았다. 저녁이 되어가니 남편이 다리가 아파서 좀 쉬어야겠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잘 걷는 여자인 것을 새삼 알았다면서 이제 알겠으니 호텔로 가서 체크인도 하고 좀 쉬자며 설득한다.



잠시 쉬고 8시쯤 저녁 먹으러 나왔다. 하루종일 먹은 것 같이 배가 아직도 부르다. 호텔 근처 포차집을 찾아갔다. 한국어 메뉴판도 있고, 꽤 많은 한국인이 벽에 낙서도 하고 갔다. 유명하다는 곱창구이를 시켜서 남편과 이런저런 추억얘기를 하며 저녁 속에 머물러 본다. 아이가 혼자 자는 것이 걱정되어 화상통화를 해보니, 귀찮다는 목소리로 영화 보는 중이라 한다. 다음날 학교가야 하니 너무 늦게 자지 말라는 먼지 같은 당부를 하고 끊었다. 큰애가 하고 싶었던 것이 혼자 거실을 차지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켜 영화 보는 것이었나 보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평소에 내가 못하게 했나, 무언가 불편해서 못했었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온다.



맥주 두 잔에 잔뜩 기분이 좋아서 흥얼거리며 호텔로 걸어갔다. 또 먹냐는 남편의 놀람을 못 들은 척하고, 편의점에 들러 먹고 싶었던 과자, 아이스크림, 빵을 사서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내 양말이 떨어져 있고, 옷도 마음대로 던져 놓았다. 평소에는 그런 양말과 옷을 주워 담으며 이렇게 바닥에 막 놓으면 못 찾는다고 잔소리도 하고 제발 한 곳에 모아두라는 부탁도 했던 나인데, 지금은 내가 그래도 잔소리할 사람 없다. 다음날에 아침 일찍 당일투어 미팅장소로 가야 해서 너무 늦지 않게 자야 했다. 티비 소리가 웅웅 울리고, 귀 옆 핸드폰에서는 유튜브가 시끄럽게 떠들지만 나는 알람만 겨우 맞춘 체 잠이 슬슬 든다.


(조금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눴습니다. 다음 편에 또 함께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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