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어? 전화 안 받길래 자는 줄 알았어.
다음날 아침 7시, 아이를 깨우려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열 번째 누른 통화였다. 이미 6시 반에 일어나서 머리도 감고 준비 중이라 못 들었다고 했다. 아침 잘 먹고 가라는 말을 하고 끊는데 마음이 좀 묘했다. 나 없이 일어나 준비한 중1 아이가 너무 기특하기도 하지만, 내가 없어도 이렇게 잘한다고 생각하니 점점 내 설 곳이 작아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잘 독립시키는 것이 목표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막상 아이가 한걸음만 독립해도 불안함과 허전함이 그 자리를 채운다. 정말 이때 필요한 것은 평소에 정리해 두었던 내 가치관과 도움 되는 지식들이리라. 의지를 갖고 독립 대신 들어온 불안함을 괜찮다며 다독여 본다.
아침 7시 호텔 조식뷔페를 갔다. 너무 조용해서 식사하는 사람들이 없는 줄 알았다. 자리가 거의 다 차 있었지만 마주 앉아 조용히 식사 중이다. 남편과 나의 목소리만 식당에 울릴 뿐이다. 원래도 다른 사람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나는, 순간 많이 불편해졌다. 목소리를 더 낮추고 우리도 대화 없이 일본식 아침식사에 코를 박고 먹었다. 하나하나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도서관에서 밥 먹는 느낌으로 꼭꼭 씹어 삼키기만 했다. 식당을 나오니 나도 모르게 ' 휴 ' 하고 크게 숨을 마셔 본다. 매너 있는 일본 문화에 나는 매우 호의적이지만, 이 정도는 예의 중시하는 나도 좀 벅찼다. 순간 아이들까지 있었으면 내가 또 얼마나 호랑이 얼굴을 하고 조용하라 복화술을 썼을까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오늘은 하루 투어를 예약해 놓아서, 만남의 장소로 향했다. 날씨가 전날과 달리 쨍하니 화창했다. 마음이 그런가 싶어 다시 하늘을 보아도 오늘은 진짜 맑은 날이 맞았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노란 관광버스 앞자리에 자리 잡고 다른 승객들의 탑승을 가만히 살펴본다. 가장 어린아이들이 초등 고학년 정도이고, 딸과 둘이 온 엄마도 있고 대부분 가족 여행이 많다. 갑자기 그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일까 궁금하다. 40대 중반의 남녀가 둘만 여행을 왔으니, 너무 친근하게 다니면 부부가 아니라 생각할까 싶어 웃음이 났다. 그들은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 낄낄 거리며 웃으니 남편은 또 낯선 여자 보듯 바라본다. 여행 중에 항상 승모근이 잔뜩 하늘을 향해 긴장해 있고, 아이들이 문제없는지 살피고 다음일정에 괜찮을지 걱정하는 와이프만 봤었으니 낯설 만하다.
첫 장소는 다자이후 텐만구라는 곳이다. 학문의 신을 모신다는 이곳에서 나는 일본의 정원이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아마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 같다. 예전에는 현대적인 관광을 좋아했었다면, 이번에 나를 보니 큰 나무를 감동적으로 바라보고 아기자기한 정원에 마음이 참 편안해졌다. 적고 보니 이것 또한 여유가 있어서 자연이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다음 장소는 유후인이다. 온천 마을이라는 이곳은 인사동 거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양한 맛집과 조용한 호수는 이곳만 여행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주었다. 여기서는 남편이 큰 마음을 먹고 비싼 점심을 사주겠다며 큰소리쳤다. 아이들 메뉴 위주로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파악을 한 후, 이런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내가 다른 여자가 된 줄 모르는 남편의 제안에 나는 구글맵을 바로 열고 평점 높고 가장 비싼 곳으로 찍고 향했다. 큰소리친 남편은 둘이 여행 와서 다른 것은 변해도 돈 아끼는 와이프는 변함이 없기를 바랐나 보다. 예상치를 훌쩍 넘는 와규 가격에 나는, 생맥주를 추가하며 그 가격을 더 높였다. 남편의 마음은 중간에 화롯불이 있어서 잘 못 느꼈고, 확실한 것은 전날 백화점에서 쇼핑은 못했지만 더 큰 마음의 자유로움과 웃음이 남았다. 계산하며 당황하는 남편에게 아이스크림은 내가 쏘기로 하고 얼른 가게문을 나선다.
유후인의 호수는 양재천 같았다. 나는 양재천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느낌이 좋다는 표현이다. 뭔가 화려해 보이는 캐나다 벰프의 호수 같지 않지만 자기 자리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오래 해 온 충신 같은 느낌이다. 호수 곁에 선 문화재인 굵은 나무 또한 쌓아온 세월은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을 해준다.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 큰아이가 좋아하는 개 모양 매트와 띠별 젓가락을 샀다. 심지어 그 젓가락에는 이름도 새겨주어 짧은 시간에 해주기를 짧은 언어로 부탁해 보았다. 유후인을 돌며 끊임없이 이건 큰애가 좋아하겠다, 둘째가 좋아하겠다는 말로 나머지 두 명 자리를 채워 보았다. 갑자기 챙겨야 하는 애들이 없는 것이 허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챙기는 것이 힘들어도, 아이들이 좋아하면 그 이상의 기쁨을 느꼈었나 보다. 울컥 아이들이 보고 싶어 져서 남편한테 말했다.
나 이제 집에 가고 싶어.
유노하나, 벳부를 마지막으로 들렸다. 프로그램 없이 여행했으면 엄두도 못 낼 코스였다. 내 컨디션만 챙기면 되는 상황이니 길어도 가뿐하게 소화했다. 특히 여행지에서 가이드분 설명 듣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데, 의미를 모르고 보는 관광지는 유튜브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 때문에 설명이 참 재미나다. 이것 또한 아이들이 있을 때는 컨디션을 봐서 움직여야 해서 가이드 분이 있는 팀으로 여행하기 쉽지 않았는데 해 보았다.
저녁쯤 호텔 근처에 도착하여 잠시 호텔로 들어와 아이에게 전화를 해본다. 내일이면 간다는 나의 말에 아이가 좋아하는데 진심이 안 느껴진다. 유치해지는 것을 보니 짝사랑모드가 심해져서,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다. 마음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는데 아직 하루 밤이 남았다. 왜 갑자기 집 천장이 보고 싶은 것일까. 나는 겉으로 참 E처럼 보이지만 I가 분명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마지막 식사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결정했다. 강가에서 먹는 것이 멋있어 보인 것도 있었지만, 일본 음식이 생각보다 느끼해서 계속 먹기가 어려웠다. 다음날 한국 가는데 한식 먹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점 2.3이라는 점수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호텔 앞 식당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역시 기대치가 낮아야 만족도가 높다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도 맛집 평점과 같은 것일까. 기대가 높으면 다음 순서는 아쉬움이니. 안 어울리는 그 둘이 짝꿍임을 자꾸 잊고 어리석을 때가 많다. 뜬금없는 큰아이 전화에 놀라 받아보니 핸드폰 관련해서 무언가를 풀어달라는 연락이었다. 해결을 해주고 식당을 보여주며 이곳에 같이 오자며 영업을 해본다. 오늘도 수요 없는 공급 같은 영업이다.
집에 오니 꿈만 같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느낌이다. 내가 진짜 일본에 다녀왔나 싶고, 여행 빨래와 밀린 현실에 힘을 쏟는다. 남편에게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남편은 일본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별말 없이 집안일을 한다. 그런데 우리 남편도 일본에서와 같은 와이프를 지금 만나고 있을까.
후쿠오카에서의 와이프는
남편이 결혼할 때 사랑했던 그 여자,
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