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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Oct 18. 2023

곪아 터진 학교 교육 2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내 생각과 글은 해답일 수 없다. 수많은 제안 중 하나일 뿐이다.

곪아 터진 학교 교육 1과 2는

브런치북 <그 책, 좋아>에 넣으려 원고를 준비했으나 '회수 30' 제한에 걸려 아쉽게 넣지 못한 내용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grhill01

곪아 터진 학교 교육 1에서 이어집니다.




교사의 업무역량

   교사의 업무 추진에 관한 성찰과 정책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교사 중에 일부는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도록 잡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사의 언어와 행동 하나하나가 학생의 성장과 발달을 돕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이론은 꺼내지 않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특히 행정업무도 잡무라고 생각한다. 경험상 잘못된 태도다. 소규모 학교에서 다양한 행정업무를 다뤄 본 경험은 수월하게 업무 능력을 키운다. 큰 학교로 옮겨 갔을 때, 업무 가지 수가 줄어 행정업무가 별로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교사의 행정업무 처리 역량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2천 년대 초반 일부 학교에서는 담임 업무가 힘들다고 담임에게는 담임 업무만 맡기고 행정업무는 비담임 교사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 학교에서 담임을 주로 하다가, 전근을 간 학교에서 행정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줄 몰라 애를 태우는 경력 교사도 있다. 이를 지켜보는 부장교사나 교감, 교장은 교사의 역량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요즘은 교무행정사를 배치해 교사의 행정업무를 덜어주고 있다. 이 또한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행정을 소홀히 하면 교사의 권리를 행사하기 어렵고 교사가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안타까운 시대 분위기다. 행정업무를 효율적으로 정확하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함은 교사의 기본 능력이다. 교사의 역할 중 행정업무, 기획에 패트릭 G. 라일라가 지은 <The One Page Proposal 강력하고 간결한 한 장의 기획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교사의 업무 처리와 관련한 자세와 태도의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

   둘째,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에 조선에서 “군대의 1일 행군 거리를 30리를 표준으로 했다거나, 100리를 행군하면 건장한 10할만 따라와 패하고, 50리를 행군하면 50%만 따라오고, 30리를 행군하면 2/3만 따라온다”라고 한다. 따라서 좋은 자리를 잡고 적을 기다리라는 것이 와닿는다. 이는 학교에서 업무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관리자와 교사들이 같은 속도로 같은 목적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지 교사 간에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도와 실행력에 차이가 있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으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 말하며, 사소한 것에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을 쫀쫀하다거나 좁쌀 같다는 표현으로 폄훼한다. 이런 주변의 분위기에서 ‘디테일이 성공으로 가는 키’라는 표현은 설 곳이 없을지 모른다. 디테일에 성의를 다하지 않는 모습은 대체로 그 사람의 마음에 흐르는 수양의 수준을 반영한다. 위대한 일과 위대한 성취는 모두 하나하나의 작은 일, 하나하나의 디테일이 쌓여 이루어지는 일이다. 바쁘다고 불평이나 힘들다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자. <디테일의 힘> 저자 왕중추가 말하는 작지만 강력한 디테일의 힘을 믿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넷째, 책을 읽는 교사여야 한다. 교무실 책상에 교과서와 자습서, 교사용 지도서만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교사는 교사에 알맞은 독서 목표를 세워 실천해야 한다. 일본의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력에 대한 안내 즉, 고전 수준의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를 4년 동안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을 형성시킨다는 사례를 제시한다. 명나라 사상가 이탁오를 통해 성찰할 기회를 얻기도 기대한다. 그의 말이 충격적이다. “나이 50 이전에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이탁오가 나이 오십이 되기 전까지는 학문했다지만 주체적이지 못했고,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으며, 이를 실천하면서 살아왔음을 반성하는 것이다. 교육내용, 교육정책을 다른 사람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생활지도 방향의 재정립

   학생 생활지도 방향과 원칙과도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다시 중지를 모아 보완해야 한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뉴욕시장 쥴리아니와 경찰청장 윌리엄 브래튼이 의기투합하여 뉴욕을 무법천지에서 질서를 찾아가 뉴요커가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학교폭력이 줄지 않는 상황을 보면서 제로 톨러런스(절대 불허)도 고려해야 한다. 무너진 교사의 영향력과 교실 상황은 학생 인권조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한다.

   수학을 포기한 이른바 수포자와 같은 학업 포기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이때 교사는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가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천지를 개척하고, 새로운 것을 기도하고,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패배자들인 경우가 많다. 교육의 주요한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 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한다.” 인구 감소를 예측할 수 있는 시점이니 학생 하나하나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 

   다문화 가정의 학생 수가 늘어나고 있다. 포용하고 길러낼 인재로 봐야 한다. 근거로 <여기가 당신의 피난처입니다>에서 “강제송환금지의 원칙”은 난민 보호의 가장 주요한 초석임을 알려 준다. 난민협약 제33조 1항은 “체약국은 난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그 생명 또는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영역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4조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해 피난처를 구하고 그곳에 체재할 권리가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서양은 논리적 사유의 전통이 우세했음에 견주어 동양은 경험을 중시했다. 교직에서 경험은 학습지도는 물론 교내외 학생의 생활지도 영역에서도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한다. 경력교사의 교직 경험을 존중하는 분위기도 필요하다.     


교육의 지향

   거시적인 관점에서 교육의 방향을 고민해 본다천 년 전에도 교육에 관한 고민과 반성이 없지 않았다. 

 『學記는 교육 실패의 원인을 일차적으로 학생 측에 있다고 보지 않고, 학생을 일깨우는 선생 측에 있다고 명언한다. 이외에도 교육방법, 잠재적 교육과정, 수준별 수업, 토론학습, 질문하기, 교육의 목적, 교사의 권위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입식, 강의식 수업은 수용적 사고력만 키워 비판적 사고력, 창의적 사고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여러 가지 연구 결과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수용적 사고력이 높아 학점이 높은 학생들이 급변하는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수업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며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 핀란드 융합 교육에 관심이 쏠린다. PISA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핀란드와 한국의 교육을 비교하며 사교육비 부담이 높고,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비효율적 공부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정도의 교육 현실 파악은 누구나 하는 수준이다. 입시 중심교육에서 벗어나 희망을 주는 교육이 시급하다.

   <희망의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이 즉각 반응식의 태도와 행동으로 법과 질서를 위반하며, 사회에서 소외되고 결국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인문학을 배움으로  즉각 반응의 행동 방식은 성찰적 사고로 바꿀 수 있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공적인 삶에 참여도를 높이고, 빈곤으로부터 탈출구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생한 증언이다. 

   최고의 공부란 어떤 것일까? 학교성적은 성인이 되면 누구도 묻지 않고 필요도 없다. 얼마나 지속해서 공부하고 관심을 두느냐가 중요하다. 시험을 위한 공부는 덜 중요하다. 텍스트에 내재한 원리를 찾고 다른 문제와 연결하기를 생각하는 공부가 중요하다. 세상은 정답 없는 문제들이 더 많다. 불확실성에서 길을 잃지 않고,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찾아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돈과 명예보다는 공부의 의미를 찾도록 해야 한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이어야 한다.

   현대 공교육의 표준화로 학업 중도 포기자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 학업에 대한 강도 높은 억압과 불안, 재미를 느끼지 못한 채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이라는 여러 가지 외부효과를 낳는다. 학교에 대한 사고방식, 학교의 운영 방식을 바꿔 산업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를 한 개인으로 대하고 인생은 일직선이 아니니 과잉 양육하지 말라는 <학교 혁명>이 제시하는 교육의 방향이다.

   <그 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는 PISA 순위가 교육 전부가 아니라며, “PISA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분명 학교 교육이 성공적이란 의미다. 하지만 이는 교육의 반쪽, 즉 기능적 측면에서의 성공일 뿐이다. 다른 반쪽, 가치와 윤리의 측면에서 우리나라 교육이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안타까워한다.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는 경제 성장, 경제 개발에 효과가 있는 교육으로부터 민주적 시민 정신을 갖춘 성숙한 인간의 형성을 위한 교육으로 방향을 바꾸자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예술교육에 관심을 두자고 한다.

   PISA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부모의 교육열도 높고, 유대인보다 평균 IQ가 높은 한국 학생들이 왜 행복하지 않은가? 미국 아이비리그에 진학한 한국 유학생의 중퇴율이 50%에 가깝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고등학교까지 똑똑하다는 한국 학생들의 대학 이후의 삶이 어째서 행복은 물론 성공적이지 못한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교수학습 방법

   교사라면 교수-학습 방법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학습지도 역량을 키워야 한다.

   90년대 초 열린 교육이 초등교육을 휩쓸고 중학교까지 영향을 끼쳤다. 영향은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 함께 있었다. 2천 년대 초에 ICT 활용 교육이 변화의 방향을 잡았고 최근 하브루타, 협동학습 등 다양한 시도를 한다. 열린 교육은 흔적만 남겼고, ICT 활용 교육은 이름은 사라지고 교사의 수업 방법에 녹아들었다. 교사는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을 익혀야 하지만, 특정 교수학습 방법에 쏠리는 것은 우려할 일이다. 교과 내용에 따라 적합한 교수-학습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브루타 학습방법이 좋다고 독서하지 않아 배경 지식이 부족한 학생들에게 하부르타 학습을 시도하는 어리석음을 보면 안타깝다.

   교직에 첫발을 내딛는 선생님에게 유익하고, 경력이 있는 선생님도 자신의 교수법을 되돌아보고 평가하는 좋은 기준이 될 <최고의 교사는 어떻게 가르치는가>가 읽히고 있다. 특히 경력 교사 중에서 교실 분위기를 끌고 가지 못해 학생에게 끌려다니거나, 무시당하는 선생님이라면 꼭 읽어보면 좋다. 기법 45번째 ‘온화한 동시에 엄격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판단과 반복적인 실천으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교사 중심의 설명식 수업에 익숙한 교사와 학생들은 토론을 힘들어한다. 시험공부와 문제 풀이식 공부에 치우친 원인도 있지만, 절대적인 독서량의 부족이 큰 요인이라고 본다. 토론의 중요함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인용된 키케로의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토론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논지의 완벽함이지 그 논지가 지니는 권위의 무게가 아니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이들의 권위가 배우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장애의 요인으로 작용하여, 결국 학생들이 자신의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든다. 권위의 무게가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주어진 문제의 답을 스승이 내린 판단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피타고라스학파에서 통용됐던 이와 같은 관행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들은 논쟁에서 “우리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는 식으로 대답하는 습관이 있었다. 여기서 스승은 물론 피타고라스를 가리킨다. 이미 정해진 견해들이 아주 강해서 타당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은 채 권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식이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소홀히 해서 안 되며 준수해야 할 의무다. SNS에 댓글을 달아 징계를 당하거나, 시험문제를 정치와 연계해 출제하여 기사화되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 성향이 다를 수 있으나 중립은 지켜야 한다. 어둠이 스스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밝음 때문에 어두운 것이고, 밝음이 변하여 어두운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교사의 정치적 성향을 교실에서 드러낼 필요는 없다.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에서 저자는 교직의 전문성과 학교의 자율성 강화를 제언한다. 이중 교사는 모두 대학원에 다니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대학교수들의 밥벌이에 보탬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투입대비 효과가 높은 대학원 커리큘럼 중 하나가 교수가 강의하는 교육대학원이라는 소문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하여 <분노하라>는 분노할 줄 알아야 진보가 있고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한다. 정치 분야는 잘 알지 못하나 생활 속에서, 제도에서 바꿔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무관심은 최악의 태도이고 분노할 줄 모르면 권력은 전제화한다. 분노가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참여라는 방법을 통해 분노하여야 한다.     


   교직 경험과 독서를 통한 배움을 이은 성찰을 토대로 선택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첫째, 제도적으로 보장된 교육과정의 자율성을 누리지 못하는 학교를 보면, 아쉬움이 크다. 하루 10분이나 20분 아침 독서시간을 운영하나 효과를 검증하지 못한다. 양서 읽기에 기울이는 노력이 너무 미약하다. 독서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학교장이라면, 학부모의 동의를 이끌어 주당 1시간, 혹은 2시간씩을 독서 시간으로 설정하여 전교생이 함께 책을 읽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책을 많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독서 지도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교사를 초빙할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이 학창 시절에 지적 오르가즘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둘째, 교사 간 행정업무의 편재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교무행정사에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교사 연수를 통해 행정업무를 처리할 역량을 키워야 한다. 행사 기획서조차 설계하지 못하고, 교사는 수업만 하면 된다는 억지 주장은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짓이다.

   셋째, 유학 가는 자녀를 둔 부모와 유학생이라면,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하고 떠나도록 해야 한다. 오리엔트가 서양인의 경험 속에 차지하는 지위에 근거한 사고방식이 오리엔탈리즘이다. 쉽게 풀어 서양이 우위에 있고 동양은 열등하다는 사고와 행동이다. 이들에게 배워오면 같은 사고를 할 것이라 우려한다. 이미 우리는 서구화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시스템 안에서 살고 배운다. 교사와 학생이 서양 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 >를 읽은 것은 다른 차원이다.     


국가와 교육

   교육 분야에서 국가가 할 일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국가가 책임질 교육은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법’이어야 한다. 각자가 ‘좋은 삶’을 살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돼야 한다. 획일성을 탈피하고 협력과 소통 능력을 높이는 일에 더욱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직업교육이건 대학교육이건 개인이 교육받는 것은 사회에 이익이 되니 가능한 범위와 시기에 따라 무상으로 제공해도 될 것이다. 

   우리 교육에서 늘 근본적인 문제인 대학 입시를 위한 경쟁 때문에 교육개혁이 좌절된다. 대학은 정말 공부하려는 사람만 가는 학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입식 교육으로는 철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도록 교육할 수 없다. 프랑스 교육개혁은 보수 중의 보수인 드골이 해냈음을 참고해야 한다.     

   한국교육과 관련해 <키루스의 교육>과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를 떠올린다. 

키루스 대제는 오늘날 이란 사람들에게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보수적인 규율을 강제하는 이슬람 통치 체제에 반발하며 ‘진정한 이란의 통치자는 키루스 같은 이여야 한다’고 믿는다. 영화 ‘300’은 다분히 오리엔탈리즘적인 프로파간다가 풍긴다. 크세르크세스가 왕인 페르시아는 억압적인 전제정치를 하는 나라로 그리고, 민주적인 그리스 세계가 페르시아를 무찌르는 것으로 그린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회상>을 저술한 크세노폰은 키루스를 흠모하여 페르시아 용병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키루스의 교육>을 썼다. 과거와 현재에 페르시아를 보는 관점이 이처럼 다르다. <키루스의 교육>은 점수를 따고, 스펙을 쌓아 대학과 취업에 자녀를 내모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반성의 거울로 삼을 내용을 담았다. 일화를 통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읽는다. 키루스는 청년교육을 받던 시절 페르시아적 정의관과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키루스는 한 선생님에게서, 작은 옷을 갖고 있던 덩치 큰 소년이 큰 옷을 갖고 있던 덩치가 작은 소년을 발견하고는 작은 소년에게서 큰 옷을 빼앗아 자신이 입고 있던 작은 옷을 소년에게 입혀 주었을 때, 어떤 판결을 내리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에 키루스는 두 사람 모두 자기 몸에 맞는 알맞은 옷을 갖게 되었으므로 둘 다 좋아졌다고 대답했는데, 선생님은 그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꾸짖었다. 옷이 잘 어울리는지를 판단 기준으로 삼을 때는 키루스의 판단이 옳지만, 옷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삼을 때에는 판단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키루스에게 법을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며, 이에 어긋나는 것은 그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키루스는 자신의 정의관, 즉 ‘누구의 것인가’라는 원칙보다는 ‘누구에게 더 어울리고, 적합하고, 이득이 되는가’라는 관점에 따라 제국을 건설해 나갔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학생들 속에서 ‘배움’이 일어나도록 수업 방식이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어넣는 교육에서 꺼내는 교육으로, 듣는 교육에서 말하는 교육으로, 질문이 없는 교육에서 질문을 발굴하는 교육으로, 우리의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되도록 제도적인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와 정책의 변화는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교육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만 가능하다. 그 변화의 주체는 우리 사회 전체가 되어야 한다.




중등교육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건조하게 마감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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