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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Nov 12. 2023

망각과 자유

강신주가 풀어주는  장자 철학

   강신주가 풀어놓은 장자철학 책이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내가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선입견, 부정적 생각, 분노, 미움 등을 잊어야 소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쉬운 한 문장을 위해 강신주는 장자철학을 여러 단계를 거쳐 풀어주려고 애쓴다. 망각이란 무엇인가를 서양 철학사에서 어떻게 다루는지, 장자철학과 서양철학의 차이는 무엇이고, 장자가 어떤 비유를 들어 망각을 설명하는지를 풀어간다. 장자 철학은 서양 철학의 범주를 벗어난 지점에 위치를 잡고 있다고 한다. 호접몽이라 불리는 나비의 꿈과 송나라 모자 상인 이야기, 조삼모사에 얽힌 장자 철학은 장자의 소통을 위한 철학을 설명하는 세 가지 중요한 사례다.     


   장자는 道行之而成(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이라 한다. 루쉰의 고향이란 글도 뿌리가 장자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저자는 망각을 ‘망각이란 타자로 비약하기 위한 가벼움과 경쾌함을 얻기 위한 노력’이라 정의한다. 망각과 비움은 타자에게 비약(독자는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한다)하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타자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타자에게 비약할 수 있다. 우리가 선입견을 비운다 해도, 타자는 여전히 타자로서, 그리고 온전한 자유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진인사대천명'인가보다. 사랑이란 타자, 자유, 고독을 함축하는 과정이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까지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그림자에 가려있었다. ‘상기설’이 기억에 의존한다는 거다. 칸트, 피히테, 헤겔로 이어져 독일 관념론까지가 그렇다. 현대 서양 철학이 마침내 ‘망각’을 하나의 문제로 직면하여 중국철학과 대화하게 된다. 중국에는 망각이 기억력이 저하된 상태가 아니라 긍정적 사유의 역량으로 긍정하는 사유전통이 존재한다. “이 책을 쓴 까닭은 대륙철학의 경향에 앞서 망각을 진지하게 숙고했던 장자와 혜능의 사유사이에 교량을 놓으려는 뜻”이라고 밝힌다.      

   플라톤은 기억(상기)을 무지, 망각보다 탁월한 상태라는 가치론적 이분법 입장에 있다. 헤겔은 반대로 기억이 부정적이고 망각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이라고 이해한다. “니체는 ‘망각’이란 저지장치가 파손,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유될 수 있다. 망각이란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일 수 있다”라고 한다. 여기서 망각은 기억을 초월하려는 힘이요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이다.      

   지속적으로 행복하려면 수단과 목적이 같아야 한다. 아이들의 놀이가 그러하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레비나스는 “어떤 방식으로도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다. 미래는 타자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연결을 꿈꾼다면 기존의 모든 연결은 잊어야만 한다”는 들뢰즈의 통찰은 자신에 대한 기억 혹은 주체의 동일성을 망각해야 한다는 장자의 생각과 만난다. 중국 철학에서 망각은 새로운 세계(혹은 사태)와 소통할 수 있게 해 주는 긍정적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망각은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의식의 자기 동일성’을 잊는 것이지 삶 자체의 능동성을 잊으려는 게 아니다.     

   칸트는 “이론적 관심에서 진리를 얻고, 실천적 관심에서 선을 얻고, 아름다움은 무관심으로 대상을 볼 때 얻는다”라고 한다.      

   장자는 제물론의 구멍, 바람, 바람소리에서 “바람소리는 타자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생성된 것(바람과 구멍이 마주쳐서)”이라 한다. 타자와 마주쳐 그에 걸맞은 소리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소리를 내기에 바쁘기에 우리는 ‘속이 꽉 막힌 피리’라 할 수 있다. 타자와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발생하는 소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소음(기쁨, 노여움, 순종, 걱정, 고집, 아첨, 교만, 허세, 가식 등) 일뿐이다. 그러하니 내면에서 우려 퍼지는 소음을 제거해야 한다.     

   인간은 집요할 정도로 자기중심적 존재라서 비움의 단계를 거쳐야만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와 마주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비움, 마주침, 울림의 과정을 거쳐 창조로서 표현된다. 자의식을 비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타자와 마주칠 수도 없고 어떤 울림도 발생할 수 없다. 비움과 망각을 통한 마주침과 울림은 예술적 창조의 가능성을 확보해 준다.(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예로 든다)     

   강신주의 생각으로 장자는 철학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야기책이란다. 송나라 상인이 모자를 팔러 월나라에 갔다가 경험한 아찔함은 타자와 조우하면 자의식의 동일성은 동요, 와해한다는 거다. 송상인이 월나라에서 접하는 것이 ‘타자성의 테마’이고, 송상인이 상인이면서 상인이 아닌 자신의 동일성이 와해되는 듯한 경험을 ‘판단중지의 테마’라 한다. 부단한 판단중지의 상태에서 편안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 판단중지는 에포크다. 타자성을 경험하게 되면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이르게 되고, 역으로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에 있게 되면 타자성을 경험하게 된다. 장자 수양론의 핵은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일종의 판단중지 상태를 우리 마음속에 확보하라”는 거다. 송나라 상인의 경험(모자),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의 경험(조삼모사), 장주의 경험(호접몽, 나비의 꿈)은 모두 ‘판단 중지의 테마’와 ‘타자성의 테마’라는 양행의 논리를 설명하는 거다.     


   장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문제를 전면적으로 사유했는데 이는 자신과 타자 사이에 엄청남 틈을 긍정하고 이 심연을 건너가려고 모색했다는 점”이 의미 있다. 그래서 자신을 비워야만 한다. 비운다는 것은 보물처럼 가지고 있는 것들(선입견, 오만, 자의식, 사변적 사유 등)과 경건한 작별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다 비워도 타자에 이른다는 보장은 없다. 결국 비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양 수단이다. 또, 장자는 ‘시간을 없애라’고 한다. 시간의 의식을 없앤다는 것은 어떤 기억도 담아두지 않고,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것, 나아가 기억과 기대에 의존하는 지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타자와 얽혀서도 그것과 공존하는 상태를 달성“할 수 있다.     

   사랑이란 자신에게 기쁨의 감정을 만들어 주는 어떤 타자와 지속적으로 마주치려는 본능적 감정이다.

     

2017.9.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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