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충덕 Nov 23. 2023

생각의 역사Ⅰ:불에서프로이트까지

2부  영혼의 로맨스

생각의 역사 Ⅰ 불에서 프로이트까지

A History of Thought and Invention, from Fire to Freud          

       


생각의 역사 Ⅰ(불에서 프로이트까지)은 미주까지 1,191쪽 분량이고, 생각의 역사 Ⅱ(20세기 지성사)는 1,297쪽 분량이다. 생각의 역사 Ⅰ만 정리한 것이 12,000자로 양이 적지 않아 어제부터 4회에 걸쳐 공유한다. 메모가 새롭고 기존의 지식을 확인하거나 관점을 바꾸게 하는 등 의미 있는 내용 중심이라 이를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으나, 나는 아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책값은 각권 45,000원이다.


낱낱의 지식이라 연결되지 않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음.


2부 이사야에서 주희까지 영혼의 로맨스

   사후의 삶, 부활, 심판, 천국, 낙원, 천국과 지옥이란 관념은 모두 조로아스터교에서 처음으로 생겨났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를 상당 부분 볼 수 있는 이유다. 우파니샤드에는 삼사라와 카르마라는 쌍둥이 교리가 나온다. 삼사라(영화가 있다)는 윤회이고, 카르마는 다음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생명의 힘이다. 이 쌍둥이 과정의 주제는 아트만, 즉 영혼이다. 

   우리에게 전해진 대표적인 그리스의 유산은 아테네 민주주의와 이오니아 과학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원하지 않았으니 현대 의회민주주의와 다르다. 이오니아 과학은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나 같은 과학철학의 질문,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쾌락, 부, 존경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치에 맞게 처신하는 것이 곧 행복이다. 행복을 위해서는 격정을 통제해야 한다. 항상 평균적인 위치, 대립하는 양극단의 중간을 추구해야 한다. 중용의 가르침, 육조단경의 ‘양변을 여의라’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기원이 현상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두 가지라 통찰력 했다.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을 두려워한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내재적 원인이다. 이를 개념화하여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개념이 생성된다. 

   

   이스라엘에서 히브리 성서(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약성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온전한 형태를 갖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고대 문명 세계에서 주축의 역할을 하게 되기까지 카라키타이, 즉 ‘필기사’들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그리스, 바빌론, 인도 등지의 지혜를 수집하려 모든 나라의 군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소장한 문헌을 필사할 수 있도록 보내달라 요청했다. 빌린 원본을 소장하고 필사본을 원본처럼 위조해 돌려보냈다. 그러나 640년 아랍 정복자 '이븐 알 아스'에 의해 파괴되는데, 도서관의 책들은 인근 공중목욕탕에 나눠주고 불쏘시개로 쓰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제외하고 불타는 두루마리는 알렉산드리아 목욕탕 물을 여섯 달 동안 덥혀주었다. 여기에 다른 연구도 있다. (브런치북에 '브리지 오브 이슬람'에 언급함)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는 서로마 제국이 쇠퇴한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내부 약점이고 야만은 외부 약점으로 요약한다. 이 견해는 지금도 유효하단다.  

   기원전 313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즈음 전통적인 순환적 시간관은 신의 의지에 따른 線的과정으로 보기 시작했다. 역사는 특정한 목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이며, 앞으로 세상이 6,000년 동안 계속된 후 신은 의도를 드러낸다는 신앙이다. 고통은 고귀하며, “순교는 현세에서 한 시간의 고통을 겪는 대가로 영원불멸의 행복을 얻는 길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성공한 원인 중 하나는 사제직의 성장이다. 주교만이 신도들과 신을 매개하고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관념이 싹텄다. 사제는 “정치, 경제, 지성의 특권을 누렸으며, 서양 사회에서 1천 년 동안 내내 중요한 세력이었고 때로는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신약성서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92년이다. 그리스도교가 문헌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유대교와 결별했고(자세하게 서술되지 않아 공부가 필요하다), 글을 아는 사람은 사제뿐이라 사제의 권한을 강화해 주었다.

 

   ‘기원전’이라 부르게 된 것은 18세기에 생긴 관습이며, 중세를 역사의 ‘어두운’ 시대로 보는 견해는 14~15세기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처음으로 구상했다. 얼마나 암흑이었는가? 최초의 신성로마황제이자 가장 위대한 중세 군주였던 샤를마뉴도 글을 알지 못했다. 1,500년까지도 옛 로마의 도로가 유럽에서 가장 좋은 도로로 사용됐고, “독일, 잉글랜드, 홀랜드,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1천 년에 걸쳐 세워진 성당을 제외하고는 석조 건축이 사라졌다.” 고향을 떠나지 않는 폐쇄적인 삶을 살아 지역 방언이 발달해 불과 몇 킬로미터만 떨어져도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p. 356)

   콘스탄티노플은 암흑시대에 사상의 보존에 지대하게 이바지했다. 야만족들은 로마제국을 침략하면서 막심한 피해를 주었지만 동시에 선진적인 로마 문명의 가치를 인정했고 상당 부분 계승하고자 했다. 학문의 실종을 프랑크족, 반달족, 고트족의 책임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쇠퇴의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과학적 탐구를 단호하게 거부했고, 일부 그리스도권에서는 책이 의심의 근원이라고 여겼다. 온갖 오류와 미신이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학문, 특히 과학은 아랍에서 꽃을 피운다.(브런치북 '브리지 오브 이슬람'에서 다룬다)


   8세기말 종이가 수입된 것은 생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암흑시대에 중요한 변화였다. 종이가 파피루스를 대체했다. 11세기가 되면 서유럽에서 종이의 사용이 급속히 늘었다. 950년 이후에 필사가 소문자로 통일되었다. 한 면에 많은 글자를 쓸 수 있어 경제적이었고 고대 문헌의 보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세계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을 직접 아라비아어로 읽으며, 단 한 가지 번역(터키어 번역)만 공인하고 있다. 이슬람교에는 공식적인 미학이 없지만, 훗날 전통으로 확립된 전반적 관념은 장식과 치장의 관념이다. 창조나 신이 준 것을 개선하는 행위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신을 공경하고 찬미하는 수단으로 이해해야 한다. 8세기에 약국의 개념이 탄생한 곳이 아랍이고, 바그다드에서는 약사 시험에 합격해야만 약을 짓고 처방할 수 있었다. 공중보건의 관념도 아랍인에게서 나왔고, 의사들은 환자를 방문해 주변에 전염이 될만한 질병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의사 알라지는 천연두와 홍역을 처음으로 설명했다. 이슬람 의사 '이븐 시나'가 쓴 「의학정전」은 아라비아와 그리스의 의학 사상을 집대성한 것으로 12세기 라틴어로 번역되어 적어도 17세기까지 500년 이상 유럽의 의학교에서 기본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9세기 후반 바그다드에는 서점 100여 군데가 같은 거리에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이 마호메트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은 '알가잘리'다. 주저 「종교학의 부활」을 통해 이슬람교의 기둥, 일상생활, 열정과 욕망, 신에게 가는 길을 이야기한다. 알가잘리 이후에는 수니파 이슬람교(코란과 마호메트의 일상 행동이 충분히 안내가 된다는 믿음)가 득세하게 되었다.

   서양 사상에 미친 영향의 측면에서 '아베로에스'가 중요하다. 그의 사상과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코란과 조화시키려 했고, 이성과 계시의 역할을 조화시키려 했으며, 다양한 인구 계층들을 지성과 교육에 따라 구분하려 했다. 코란의 말씀을 전부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코란의 문구가 철학의 합리적 진리에 어긋나면 그것은 은유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1470년대에 베네치아에서 아베로에스의 책이 50여 종이나 출판되었으며, 아베로에스주의는 유럽의 손꼽히는 대학들에서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었다. 

   13세기말에 이르면 아라비아 과학과 철학은 대부분 유럽에 전해졌다 아라비아의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은 서양 학문의 초기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바그다드에서 스페인의 톨레도에 이르는 거대한 우회로는 지금 우리가 지닌 기본적 사고의 틀을 형성한 셈이다. (이미 「지혜의 집」, 「이슬람 문명」, 「그리스 사상과 아랍 문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확인한다. 브런치북 ‘브리지 오브 이슬람’에서 다룬다. )


   “기원후 499년 인도의 수학자 '아리아바타'는 파이의 값을 3.14 16으로, 태양년의 길이를 365.358일로 계산했다.” 같은 시기에 지구는 구 모양이고 자전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관념을 생각해 냈다.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드리워져 월식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가 거의 1 천년 뒤에 그런 사실을 발견한 거다. 십진법, 자릿수 기수법, 1에서 10까지의 숫자 기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인도가 거의 확실하며 876년 그런 방식이 자리 잡았다. 활판인쇄가 중국의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 먼저 개발된 것은 확실하다. (p.445)


   송대의 '심괄'은 타이항 산맥이 과거 바다였음과 중국의 상세 지도를 최초로 제작했고, 천문학, 수학, 야금술, 약학, 지도 제작법에 조예가 깊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유형의 인간으로 본다.  서양인들이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가 끝날 무렵 생각과 발명의 가장 중요한 원천을 이루는 대문명권 들은 중국, 인도, 이슬람이었다. 13세기 이후 동양은 움츠리고 점차 뒤처지게 되었는가? 저자는 역사학자들을 괴롭히는 난제라고 본다.


소제목이 ‘이사야에서 주희까지’이나 주희(주자)는 널리 알려진 바라서 언급하지 않는다.                 

3.4부에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grhill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