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에의 충동>은 삶에 고투(苦鬪)하는 본능에 충실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고난은 신의 선물이라는 주제로 인생을 고난에 담금질하고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과 패배를 패배시키라, 이 세상 모든 것은 희망이 만든다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소개한다. 대조되는 책이 <완벽의 추구>다. 완벽주의를 좇지 말고 최적주의자가 되라는 이야기다. 몽테뉴의 <에세 Essais>를 풀어놓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결점을 지낸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라는 거다.
CBS 시사자키 정관용이 ‘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묻는 인터뷰를 글로 읽었다. 누군가의 글에서 필사하기 좋은 책이란 평도 있었다. 인터뷰는 미혼, 여성, 취준생, 학생들이 좋아할 소리였다. 필사하기 좋은 책이란 평은 ‘필사하기 좋은 칼럼이 실린’이어야 한다. 저자가 서울대 교수이자 철학과 정치사상을 가르친다는 걸 고려하면 절댓값은 더 떨어진다. 많이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인 것만은 아니다. 책의 인기도는 글보다 대중매체에 노출 여부, 밴드왜건 효과(쏠림 현상, 편승효과)와 같은 외적인 요인의 영향이 클 수 있다. 그런데도 술과 노래방을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책은 사서 봐야 한다고 믿는다거나, 공부는 폭넓게 해야 한다거나(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해석함), 행복에 대한 평가, 직관, 질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나와 같다. 논어, 대학, 맹자, 중용을 일 년 단위로 돌아가며 원문으로 읽는다는 게 부럽다. 나는 완역본이나 읽고 있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글쓰기를 시작한 시각이 오전 4시 30분이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내일 아침에 독서 노트를 정리하자 마음먹었으니 나는 저자와 달리 죽음보다 삶을 선택했다. 저자의 책 제목이 역설임도 안다. 아침을 맞이하는 태도에 좋고 나쁨은 없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선택할 뿐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우리는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무시한다……. 삶은 그런 식으로 소진되며, 죽음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문장과 우리는 시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불쌍한 영혼들에 불과하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프롤로그에 실었다. 책의 제목이 담은 역설을 이해하라는 안전장치인가.
내가 사는 오늘 하루는 자살한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지 않았던 하루다. 이 문장은 벌써 클리세가 돼버렸다. C 일보 Bang의 아내 자살이 석연치 않다는 씁쓸함이 떠오른다. (‘Bang의 아내’가 누구인지 시간이 흘러서 써 놓은 나도 모르겠다)
수명 연장이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이다. 오래 지속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시간은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만든 가상현실이다. 미학자들은 거리를 두어야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갈릴 지브란의 시도 그렇다.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상처의 존재란 단어에서 오디세이 서사시가 떠오르고, <역경의 행운>에서 저자가 학문적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서 고대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사례가 떠오른다.
‘설거지의 이론과 실천’에서 밥의 시작은 장보기요 마지막은 설거지라고 말한다. 밥 짓기와 설거지를 다른 영역으로 본 중년 남성 독자의 의식을 바꾼다.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 그대로 먹느냐와 예쁜 접시에 덜어 먹느냐가 ‘문명이냐 야만이냐를 구분한다’라는 글을 아내에게 강조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예견된다. 화가 나에게 미치리라.
저자는 입시공부의 공부가 공부의 전부라는 착각이 문제라고 보는 데, 독자는 많은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면 공부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A가 부패했다는 사실이 B의 실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를 쉽게 판단할 수 없으니 억지로 꿰맞추려 하지 말아야 한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다.’
책을 읽는 이유가 무어냐는 질문에 어느 소설가의 답변은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서란다. 공감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부정이 관행을 넘어 정의의 반열에 오르는 상황이다. ‘위력이란 무엇인가’를 읽어 보니, 저자는 논문을 읽지 않고 심사한 지도교수로부터 논문이 통과된 것을 수치의 기억으로 갖고 있다. 내 논문에 빨강 색연필로 수정할 부분을 표시해 다시 돌아보도록 지도해 주신 고대 권혁재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니다. (스가 아스코의 말이다. 그녀의 <소금 1톤의 독서>를 주문해야겠다.)
하나, 아무 말 잔치를 벌이는 사람은 이성적 질의응답 능력이 없다.
둘, 모순을 참아내는 정신의 굳은살은 서슴없이 부정을 저지르게 한다.
셋, 불의와 헛소리에 대한 알레르기를 고독한 독백으로만 표현하는데, 세 가지는 주입식 교육의 결과다. 주도적으로 공부하고 토론할 줄 알아야 질의응답, 저항, 참여하는 사람을 기를 수 있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문자 해독률은 높지만, 문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OECD 국가 중 최하위(p. 205)라 하여 근거를 찾아본다. 동아일보는 2002년 1월 2일 발행한 <한국인 문서 해독능력 형편없다…OECD국 중 최하위 수준> 기사에서, 한국교육개발원 이희수 연구위원의 발언을 인용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서를 읽고 해독하는 능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보도했다.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헌신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고. 크롬웰은 복음서에 근거가 없다고 성탄절을 금지했음을 역사서가 아닌 에세이에서 배운다. 공모 당선작인 영화평론 ‘안토니아스 라인’과 문예지에 실었던 글은 책과 어울리지 않아 불편하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출간 두 달 만에 8쇄를 찍어냈다. 사회적 지위가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하늘을 날 듯이 기뻤던 때가 있었고, 나락에 떨어지기도 했던 내가 현재에 충실하니 부러워할 일만은 아니다.
P.S. 오래전에 써둔 글을 1,000자 서평으로 줄이려다가 몇 가지만 수정 보완하고 그냥 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