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열풍
내가 아는 한에서 후스와 루쉰만큼 중국 근대사에 영향을 끼친 중국인은 드물다. 19세기 말엽, 둘은 10년 차이로 태어나 중국 문학과 사상사에 큰 흔적을 남긴다. 루쉰이 1936년, 후스가 1962년에 저 세상으로 갔으니 10년 늦게 태어난 후스가 25년을 더 산 셈이다. 루쉰은 이념에서 북에, 후스는 남에 가깝다고 평한다. <아Q정전>, <광인일기>로 세상에 이름을 낸 루쉰의 작품은 프랑스 유학파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참모들을 이끌었던 문장가 마오가 즐겨 읽었다. <루쉰전집(魯迅全集)>은 루쉰이 죽은 뒤 16살 어린 아내 쉬광핑의 노력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으로 편찬된 600만 자 20권에 달하는 분량이다. 루쉰전집번역위원회에서 20권 전체를 번역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번역이 끝난 7권까지 만이라도 읽어보자 시작한 거다.
루쉰 전집 1 무덤은 1907년부터 1925년까지 쓴 에세이 23편을 묶었다. 루쉰은 에세이를 ‘잡문’이라고 한다. 독자인 나에게는 칼럼(시사평론)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역사’를 진화론으로 해석하고 사회의 진화까지 그리는 글이다.
‘과학사교편’은 서양의 자연과학발달사를 개괄하고 과학이 자연을 개조하고, 사회 진보를 이끌어왔다는 내용을 담았다.
‘문화편향론’은 중화주의 시각에서 얘기를 시작한다. 1840년 문호개방 이전까지를 정체된 중국을 ‘자존’이란 단어로 푼다.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을 실패로 평가하며 물질이나 정신에 편향됨을 극복하고 바른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확립하는 일(立人)이다. 방법으로 반드시 개성을 존중하고 정신을 발양해야 한다.”고 하는데, 21세기 한국에 필요한 화두다.
‘마라시력설’은 낭만주의 시인의 삶과 작품을 소개한다. 중국인이 바이런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자유를 갈망하고 실천(그리스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가 죽었다.)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아직 이런 중국의 적막을 깨는 선각자가 없음을 아쉬워한다.
‘나의 절연관’은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는 방안으로 얘기되는 것 중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따라 죽어야 하고, 이를 표창하고 지리지에 열녀로 기록하는 것은 남자 위주의 세상이 만든 나쁜 짓이다. 유학이 분위기를 만들었다.’ 남녀가 평등한 시대이므로 여자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1918년에 쓴 글이다.
‘지금 우리가 아버지 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가정 개혁의 방향을 살피려는 뜻으로 쓴 글이다. 자식에게 은혜를 잊지 말라 가르치지 말자.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가 생명의 긴 여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선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가 누구의 은혜를 입었는지 구분할 수 없다. 자녀를 이해하고, 지도하고, 해방해라. 효를 강요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다시 뇌봉탑이 무너진 데 대하여’에 멋진 글을 메모한다. “남의 재앙을 보고 기뻐하는 일은 신사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본래 신사가 아닌 사람이 거짓으로 신사인 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울을 보고 느낀 생각’에서 중국사에서 ‘강할 때는 이역의 문물을 포용하듯 ‘국수’는 힘이 약할 때 갖는 태도다.’라고 적었다.
‘등하만필’에서 계급사회, 봉건사회의 폐단과 중국의 정체에 관해 말하며 ‘청년이여 자각하라’ 한다.
‘국민당과 북양군벌이 대치하던 시대에 대한 추억. 중국인이 쓰는 욕(他媽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누구에게 묻기도 그렇다). 중국인의 국민성으로 비겁함, 나태함, 교활함을 증명하고 신문예로 국민정신에 불빛이 돼야 한다고 썼다. 이른바 배꼽 아래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중국 지식인들을 비웃음. 풍속을 교화한다고 여학생은 공연장과 공원에 출입금지하는 시책을 비판한다. 경부선 타고 평양 가는 것이다. 신구가 뒤섞인 상황에서 개혁에 대한 반개혁의 해독이 많아 페어플레이는 아직 멀었다는 판단.’ 등을 담고 있다. ‘무덤 뒤에 쓰다’는 에필로그로 “내 생명의 일부분은 바로 이렇게 소모되었다.” 백화를 주창하고 받는 비난과 잡문을 내는 경위를 밝힌다.
열풍은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쓴 잡문 41편을 묶었다. 여러 편의 ‘수감록’은 에세이다. 수감록에 쓴 글은 ‘부모가 맺어 준 결혼은 사랑이 없다’, ‘아이들을 철저히 해방해야 한다’, 젊은이들이여 깨어나라, 목소리를 내라‘, “우리가 국수를 보존한다면, 모름지기 국수도 우리를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적인 미술가가 중국에 필요하다‘, ’풍자화는 제대로 된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중체서용에 한계가 있으니 모두 바꾸자’, ‘1차 대전 때 러시아에 보낸 이십만 명이 러시아 혁명 이후 돌아와 혁명사상을 전파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우려일 뿐이다’, ‘백화를 비루하고 천박하다는 식자들은 ‘현재의 도살자’다’, ‘불만은 향상을 위한 수레바퀴로써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는 인류를 싣고 人道를 향해 전진한다’, ‘무릇 희생의 제단 앞에 피를 뿌린 후에 사람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정녕 ’제사 고기 나눠 먹기‘라는 한 가지뿐이다’ 등등을 싣고 있다.
<열풍>에 비해 <무덤>에 실린 글은 호흡이 길고 논리성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루쉰의 글을 읽으면서 ‘시대정신’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나는 지금 어떤 정신으로 사는가?
https://brunch.co.kr/brunchbook/grhill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