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상가 제2부 : 정치이론과 동양철학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좋은 정치가가 좋은 인간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질문하고 답한다. 우리가 늘 좋은 사람일 수도, 모든 일을 잘할 수도 없다. 때로 우리가 선택하는 분야는 우리가 ‘어려운 결정’이라고 얼버무리는, 윤리적 희생을 요구한다. 실리적인 효율성을 얻으려면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친절함을 포기할 수도 있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전통적 권위와 사회계약론을 결합한 독자적 사상을 전개한다. 홉스의 정의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의 삶은 “더럽고 잔혹하고 짧다.” 혼란이 무섭고 두려워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홉스는 보호와 순종을 함께 기대한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질투와 경쟁을 멀리하고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 가치를 찾아내라고 권한다. 비교하지 마라.
애덤 스미스는 분업에서 생산성 향상과 인간 소외라는 양면성을 발견했고 부자는 돈보다 명예와 존경을 중시한다고 파악했다. 인간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범은 기업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현대의 분업화는 극단적인 분업화로 소외에 이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생산요소로 취급되어 고용은 불안정하다. 노동자의 임금이 줄수록 자본가의 이익은 늘어난다. 자본주의는 불안정하다.’라는 점을 파악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사적 소유가 없고, 부의 상속이 없고, 소득세가 액수에 따라 가파르게 변하고, 은행과 통신, 운송산업과 모든 어린이의 무상 공교육을 중앙 정부가 통제하는 사회를 그린다. (p215)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하기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존 러스킨은 자연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인간뿐이다. 자연처럼 존재하고 인위적 추함을 경계하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나를 자연 일부로 생각할 때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소로는 환경운동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사색할 시간을 마련하라 한다. 2차 대전 중 덴마크인의 나치 저항을 다룬다. 마틴 루터킹에게 시민 불복종을 가르친 것은 소로다.
메슈 아널드는 종교가 힘을 잃은 지금 무질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문화의 힘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모리스는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 발전을 나타내는 신호가 아니라고 말하며 노동에서 즐거움을 찾고, 좋은 경제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노력은 우리의 ‘집’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일을 즐기는가. 숲과 풀밭이 있는 곳에서 사는가. 평균 식단은 건강한가. 도시들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가)
존 롤스는 현 세계는 명백히 불공정하다. ‘무지의 베일’ 사고실험(어떤 종류의 사회라면 태어나기에 안전하다고 느낄까?)을 바탕으로 어떤 환경의 부모에게 태어나든, 어떤 종류의 동네에서 태어나든 전혀 상관이 없다고 떳떳하게 마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공평한 사회를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처는 고통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도는 ‘중도’다. 양극단을 피해라. 세상에는 고통과 끝없는 불만이 널리 존재한다. 이 고통은 우리의 욕망에서 생겼으니 집착이 고통의 뿌리다. 집착을 억제하거나 고통을 초월하려면 관점을 바꿔라. 팔정도로 고통을 극복하라.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말, 바른 행동, 바른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새김, 바른 정신통일) 지혜는 단지 깨달음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생각은 서양인에게는 놀라운 것이다.
노자는 마음을 비우고 고요함을 유지하여 본모습을 잃지 말라.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 고요함과 비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일러준다.
공자는 예의 중요성, 부모 공경, 존경할 만한 사람에게 순종, 창의성(통찰)보다 보편적 지혜야말로 중요하다.
센리큐는 차를 마시면서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법을 가르쳤다. 일본인의 마음에 소박하고 진정한 것, 장식이 없고 겸허한 것에 대한 미감을 새겨 넣었다.
마츠오 바쇼는 하이쿠(575 형식)는 두 개의 이미지와 그것을 수렴하는 결구로 구성된다. 문학에서 가벼움(카루미)을 높이 평가했다.
정치이론으로 분류하고 정치, 경제, 경제성장과 경제적 불평등,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다룬다. 동양철학에서 부처, 노자, 공자를 다룬 점에 견주어 일본의 차와 하이쿠에 치우쳐 인식한다. 이는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이처럼 알랭 드 보통의 『위대한 사상가』는 자신의 관점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책은 저자와 독자가 함께 만든다는 말이 성립하는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