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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Jan 12. 2024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 2부


   1부를 읽고 이어 읽으면, 『스페인 내전』을 이해하기 쉽다.


   미국은 미국의 남북 전쟁을 치렀고, 20세기 중국대륙은 국공 내전, 지중해에서 키프로스 내전, 한반도 분단 상황 등 역사에 수많은 내전이 있었다. 냉전 국가 중 최초로 합의하여 통일을 이룬 나라는 남예맨과 북예멘이 만든 예맨 공화국이다. 그러나 정부의 부패에 분노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후티 반군이 엄존하니 역시 내전 중으로 봐야 한다. 내전은 상처를 깊게 남기고 아물기도 어렵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국가 역할을 포기하고 중국이 강국으로 성장하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조건은 절대 유리하지 않다. 정치가와 국민의 안목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스페인 내전』을 읽어가며 당대를 이해하고, 안목을 키우기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찾아보자.     



경제공황 당시 소련 정부가 미국의 기술자와 전문가들에게도 취업의 기회를 개방하자 여덟 달 사이에 10만 명 이상이 응모했다.(p. 38)

소련에 어떤 결점이 있든 간에, 파시즘에 강경하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p.52)

스페인에서 1936년 2월 자유주의파, 사회주의당, 스페인 공산당 등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의회 다수당이 되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쓴 우익 정당을 꺾고 총선에서 승리했다(p.54)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국제연맹 연설 “오늘은 우리 차례지만, 내일은 당신들 차례일 겁니다.”(p.57)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각 나라에서 지원한 조종사들로 조직한 비행대대 또한 공화파를 지원했다(p.68)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혹은 국가 없는 공산주의를 믿는 무정부주의자들은 경찰, 왕실, 돈, 세금, 정당, 가톨릭교회, 사유재산을 사라져야 할 것들로 보았다. 무정부주의는 산업화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였다.(p.80)

공화파 정부가 급히 필요했던 것은 원조가 아닌 무기를 살 수 있는 권리였다. 스페인은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다.(p.82) 그러나 영국, 프랑스, 미국은 무기를 팔지 않았고, 멕시코만 신속한 도움을 제공했고 무기와 탄약을 판 나라는 스탈린의 소련이었다.(p.84~86)

무정부주의자는 가톨릭교회를 증오하여 “당신을 신에게 맡기겠습니다”라는 뜻의 “아디오스(adios) 대신 살루드(saiud 건강히)로 작별 인사를 했다.(p.95)


프랑코의 생각,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내주느니 마드리드를 파괴하겠다.”(p.115)

공산주의자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언제나 옳다고 믿는 점에 있었다. 그들에게 두 가지 길이란 없었다. 하늘아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아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작품만 죽어라 연구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은 편협한 종교 집단들이 그들의 경전만을 믿듯 그것들만을 맹목적으로 믿었다.”(p.149)

공산주의자들은 “이교도보다도 오히려 이단자들을 극렬하게 증오한 오래된 종교 형태를 보였다.”(p.151)


독일 공군의 게르니카 융단 폭격은 유럽의 한 도시를 거의 초토화한 역사상 첫 폭격이었다.(p.262) 마드리드 폭격에 분노하고 있던 피카소는 벽화 형태로 <게르니카>를 그렸다.  게르니카 폭격이 큰 분노를 일으킨 이유는 프랑코와 스페인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이 그 사건 자체를 강력하게 부인했기 때문이다.(p.260)

공화국의 유일한 무기 공급원은 소련이었고,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그 대가로 경찰과 군대 요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고, POUM 지도부에 대해 모스크바 스타일의 숙청 재판을 하라고 까지 요구했다(P.277)

미국은 중립을 지켰지만, 텍사코는 전쟁을 한 것이다.(P.363)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편을 들고 있다”는 미국의 중립 정책이 미칠 영향을 강조하는 글(P.401)

공화파에 대한 공습은 지중해 서부 마요르카 기지에 있던 이탈리아 공군기지에서 무솔리니의 폭격기와 독일의 폭격기가 15분이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까지 닿았다.(P.403)

중요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하여 그 이유의 정당성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P.425)


1938년 10월 28일, 바르셀로나의 대로인 디아고날 거리에서 국제여단 잔여병력 2,500명의 고별 열병식이 열렸다. 26개국 의용병들이 모두가 참가했다.(P.476)

1939년부터 36년간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의 통치 기간보다 길게 스페인을 통치한 뒤 치매 기를 보이다가 82세를 일기로 숨졌다.(P.496) 프랑코통치 기간 내내 스페인은 가톨릭이 막강한 힘을 보유했고 여성의 지위가 매우 열악했다. 고문이 일상화된 경찰국가였고, 교수형구로 죄수를 처형했다. (P.496)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의 지원을 받았던 스페인이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어 추축국에 가담하지 않은 까닭은 프랑코가 프랑스의 일부 지역과 아프리카의 많은 영토를 원하는 요구를 히틀러가 들어주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주요 해군 기지를 제공해 독일 U보트의 활동 범위를 크게 늘려 주었다. 스페인령 모로코와 카나리아 제도도 독일 잠수함들의 연료 보급창이 되었다. 스페인 병사 4만 5천 명은 히틀러를 지원하였다.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이 얻은 것들 : 보급로가 길 때는 차량의 종류를 최소화할 것, 폭격기에는 전투기 호위를 붙일 것, 조종사에게 악천후와 야간 항공에 대비한 추가 훈련을 시킬 것, 소련 전차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전차 개량이 필요하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을 터득했다.

1939년 1월 루스벨트는 각료회의에서 스페인에 취한 금수조치가 “중대한 실책”이었던 것 같다고 발언하였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그가 죽기 전 10년 동안 800부만 팔렸으나, 냉전기에 소련의 배신행위를 보여 줄 수 있는 초기 사례로 지적되며 수백만 부가 팔렸다.

1945년 연합군은 동유럽 각지에 퍼져 살던 독일인 천만여 명을 강제 추방하였고 그 과정에서 50만 명 이상을 죽게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은 누구에게나 좋은 전쟁일 수 없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미국인 2,800명은 2016년에 모두 죽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주고자 하는 의지를 펼침으로써 세상이 더욱 공평해지고 자유로워졌다고도 말했다. 또한 그런 봉사 정신과 희망이 가득한 정신이야말로 심오한 영감의 원천이다.”(P.532) 현대 스페인 역사의 이면에는 이렇게 민간인 전투원들의 엄청남 희생이 수반된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이후 36년에 걸친 프랑코 독재의 어두운 내막이 숨어있다.      


 <스페인 내전>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 ‘SPAIN IN OUR HEARTS’는 갈라파고스에서 2017년 12월 1판 1쇄를 본문 614쪽 분량으로 내놓았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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