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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Mar 03. 2024

절차탁마대기만성

도올의 초기 작품이다

절차탁마대기만성

2018.6.12.(화)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담이 열리는 날에 읽고 쓴다.


   『절차탁마대기만성』이 어떤 책인가는 서문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았기에 자신의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글이라고 밝힌다. 1987년 5월 10일 단식 중에 붓으로 서문을 썼다. 김용옥의 단식은 6월 항쟁과 연결된다. 서문과 달리 본문은 이전에 발표한 글이다. 묶은 시점에 기존 원고를 다듬고 서문을 쓴 것이다. 책은 세 편의 글을 담고 있다. ‘東西解釋學理論의 역사적 개괄’, ‘讀書法과 판본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본 기독교’, ‘르네상스휴매니즘과 中國經學의 성립’이다.     


- 東西解釋學理論의 역사적 개괄

   해석학은 언어에 나타난 존재의 인식방법을 이해하는 일이다. 텍스트만 이해해서는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중국의 문헌을 예로 들어 쉽게 설명한다. <詩經>을 중국의 민요집으로 간주할 때, 본래 노래였기에 리듬과 韻을 가지고 있어 音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고 義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표음문자이므로 字와 字가 모여 이루는 의미의 단위를 분석해야 한다. 의미가 발생한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것도 필수라고 설명한다. 史가 해석학적 이해의 시간적 장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전제에서 중국 해석학의 기원은 춘추전국시대까지 올라간다고 본다. 노자의 해석학이 장자에 의해 발전한 증표로 다음을 기술한다.

“올가미는 토끼를 산 채로 잡기 위한 까닭의 것이다. 토끼를 얻으면 올가미를 버린다. 뜻을 얻으면 말은 버린다. 나는 언제나 말을 잊어버린 사람과 함께 말해 볼 수 있는지!” - 장자 외물편 제26. (p53)

도올은 중국의 禪佛敎를 인도불교를 중국인에 내재하는 해석학적 논리나 인식방법으로 탄생시킨 중국인의 중국인을 위한 중국인에 의한 순수 중국 불교라 한다. 노자에서 장자를 거처 王弼, 禪, 程朱, 이조의 性理學을 거쳐 현재까지 이르는 중국 해석학의 주류를 心學적 방법론으로 설명한다.     

 

- 讀書法과 판본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본 기독교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讀書法은 오늘날 말로 解釋學이다. 독서법에 관한 주자의 입장을 도올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텍스트와 텍스트에 담긴 저자 삶의 체험과 독자인 내 삶의 체험이라는 삼자의 인식 관계를 말하고 있고, 텍스트를 통해서 저자 삶의 체험이 내 삶의 체험과 만날 때 이해가 성립한다. 이것은 생철학이나 실존철학에 근본적으로 전제된 것이다.”     


   텍스트 자체를 정확히 알기 위한 노력을 서양에서는 문헌비평(textual criticism), 동양에서는 板本學이라고 한다. 죽목과 겸백(縑帛;비단)에 붓으로 쓴 동양, 파피루스와 양피에 갈대 펜으로 쓰기 시작한 서양, 중국에서 종이의 발명 이후 텍스트의 존재를 살펴본다.      

   수많은 구약 문서가 신약의 배경으로서, 기독교의 색안경 속에서 이루어졌다며, 經으로 자리 잡은 역사를 살핀다. 구약이 경전으로 자리를 잡는 데는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 유대교와 기독교의 완전 결별, 희랍어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히브리어 성경의 정본화 욕구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구약성경은 A.D. 1~2세기에 성립된다. 이를 밝히는 까닭은 성서라는 문헌 자체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고 나의 마음에 주어지는 의미(心得)만으로 성서를 해석하면 안 된다는 의도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에 등장하는 여러 사이비 혹은 이단 기독교가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드러나는 오류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이 두 가지다. 우리나라 이단 목회자들이 해석학에 뛰어난 건 아닐까라는 억측망상, 『기획의 정석』을 쓴 박신영은 해석학의 기본을 알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이다.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서가 아니며, 신약의 전 단계도 아니며, 신약과 대립 관계도 아니니 구약이 가진 신학적 주제들과 지향성을 알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약은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으로는 유대인의 테두리에 머물러야 한다며, 파격의 언어로 신사참배에 굴욕을 느끼듯 야훼참배에 일고의 반성이 없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구약성서>는 기본적으로 유대민족의 역사기록이다.”(p. 104)     

해석학적 연구로 도올이 맺는 것은 “정경이 교회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정경을 성립시켰다.” “신약성경 원저자의 원사본은 하나도 현존하지 않는다.” “15세기 인쇄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모든 판본은 하나도 동일한 것이 없다” 이런 데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성경을 맹신하는 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도올이 제시하는 과감한 가설을 소개하면, “기독교는 넓은 의미에서 아시아 샤머니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한국의 교회는 우리 민족문화사적 입장에서 볼 때 성황당의 근대적 변용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다. 한국 기독교가 빠르고 넓게 전파된 과정에는 기독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한국인의 전통적인 종교의식 사이에 특수한 친화감이 있다고 보고 있다. 전 인류적 보편 현상인 巫에 대한 고찰로부터 “우리는 예수라는 무당을 무당으로 쳐다볼 때만이 그 무당을 무당 됨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라고 말한다.      


- 르네상스휴머니즘과 中國經學의 성립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 지식인에게서 동양이 서양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서양을 해석할 동양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 지식인이 제대로 한국을 알고 그 인식에서 서양을 봐야 서양을 해석하는데 현재는 한국 지식인에게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특성에 따라 중국 문명의 정신과학적 깊이가 서양 문명보다 깊다고 평가한다. 공감한다. 품절된 번역본 <중국의 과학과 문명 : 정본은 9권, 축약본 원서는 11만 원>을 사봐야 할 듯하다. 조지프 니덤의 다음 말 때문이다.

“중국은 이 지구상에 존재한 어느 문명보다도 가장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기간에 걸쳐 그것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유지된 인문주의적 학문, 다시 말해서 ‘정신과학’의 본고향이 된 것이다.”(p.164)

   서양 정신과학의 역사를 고대 그리스에서 아랍세계를 거쳐 암흑시대를 지난 유럽으로 전해진 과정을 풀어놓는다. 이슬람 문명에 관한 이해가 있었기에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정신과학, 즉 휴머니즘은 중국, 동양의 수준을 서양은 따라오지 못했음을 기술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퇴계의 후예인가? 데카르트의 후예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데카르트의 후예들인 우리에게 이퇴계의 후예가 돼라 말한다. 이것은 해야 할 일이고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동양인은 자신을 래디컬하게 부정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지녔지만, 서양인은 진보라는 환상에서 자기 연속성을 견지했다. 우리가 서양을 흡수한 만큼 서양은 우리를 흡수하지 못했다.”라고 한다. 그러니 정반합으로 볼 때 동양이 우위에 설 수 있다. 


   E.H. Car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방법론도 해석학의 범위 내에 있다. 

중국 경학의 성립 과정(인문학의 발전으로 이해하기로 한다)을 진시황제의 도량형 통일, 법가 사상의 채택에서 출발하여 16세기 중국 지성이자 사상가 리즈 선생을 거처 현재로 계승된 것으로 본다. ‘인간의 마음이 도덕적 원리나 기존의 관념에 물들게 되면 순수함을 잃는다. 가짜가 된다’는 것이 리즈 사상의 출발이며, 이런 인식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學을 평가한 것이다. 『이탁오 평전』을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절차탁마대기만성』은 통나무에서 1987년 5월 초판을 본문 233쪽 분량으로 내놓았고, 독자는 2007년 중판을 구해 읽는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언어와 종교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아’ 도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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