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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Mar 13. 2024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학창 시절 시험을 위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정암 조광조를 배운다.

   “향촌 사회에서 성장한 사림은 조선 개국에 힘을 보탠 훈구세력과 권력을 다투고, 사화를 빚으며 당쟁으로 발전하니 조선 성리학의 병폐다.”라고. 한편, 일본의 어느 학자(일본 근세 유학을 연 야마자키)의 추앙을 받고, 퇴계학이라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천 원 권 지폐에 퇴계의 초상이 있다. 분명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퇴계가 학문에 미친 영향은 차이가 난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책을 알게 돼 다행이다.      


1부는 일상의 편지들이다.

   고봉의 편지에 “만약 저의 글을 없애지 않으셨다면 찾아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쓴다. 대학자에게 보낸 편지 부본을 남기지 않은 것을 안 후 돌려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현재에도 이렇게 청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여기서 고봉의 예를 따지기보다는 퇴계의 열린 자세를 배워야 한다. “포정이 칼을 댄 곳”이란 뼈와 힘줄이 맞닿은 핵심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포정은 19년 동안의 수련 끈에 소 잡는 법이 신기에 이른 사람이다.

   퇴계의 편지에 “바람에 실어 답장을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한 것은 서정이 넘친다. 고봉의 편지에서 퇴계가 말한 “우리들의 잘못은 바로 진실한 공부는 하지 않고 한갓 말로만 서로 경쟁하는 데 있으니, 이 변의 원인을 알고 돌이켜 노력한다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한 것을 되적어 진실로 겸손한 선생의 모습에 존경을 표하고 기뻐한다. 퇴계의 편지에서 진실한 공부를 방해하는 세 가지로 ‘기질과 습관의 치우침’, ‘물욕의 가림’, ‘세상사의 구속’을 든다.

   편지의 내용에 고봉은 둘째가 죽고, 퇴계는 손자가 죽어 슬퍼한다.

   퇴계의 편지 중 ‘제 이름을 빌어 나도는 책을 없애 주시길’ 고봉에게 부탁하고, 고봉은 평안도 중화에서 판각을 찾아 소각해 준다. 퇴계가 고봉에게 부탁한 것은 소견이 분명하지 못하거나 논변하기만 하고 결론을 내지 못한 바에 대한학자의 책무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퇴계의 편지 :  “여러분에게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의리가 되겠지만 그 의리를 제가 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게는 물러나는 것이 도리가 되겠지만 그것을 여러분이 하도록 강요하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윗자리에 올라야 아랫사람들의 곧고 굽음을 분별할 수 있다.”

   퇴계가 쓴 편지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릅니까’에는 고봉이 선조에게 퇴계를 남다르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퇴계는 다른 사람들의 노여움이 격해질 것을 우려하며, 고봉에게 안부를 묻는 일조차 그만두자고 한다. 이에 고봉이 퇴계를 찾아가겠다고 하고 퇴계는 남들의 눈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한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이와 같다.

   퇴계의 편지 중, ‘옛말에도 시는 고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글을 빨리 보게 되기를 날마다 발돋움하고 서서 기다릴 뿐입니다.’, ‘화살의 사정권 안에서’란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란 의미다. ‘엎어진 수레가 앞에 있으니’란 조광조가 개혁에 나섰다가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고봉의 편지 중에서, ‘하늘에 가로놓인 구름이 하늘 저 끝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음을 한스러워했습니다.’ 고봉은 자주 퇴계에게 약을 보내 준다. 조선조에는 호남과 영남 간에 소백산맥이 뻗어있어 소식을 자주 오가게 하지 못했다. 퇴계의 편지에서 격물과 무극에 대해 과거에 해석한 것에 오류가 있음을 전적을 통해 밝히는 대학자의 용기를 본다.     


2부 학문을 논한 편지들이다.

   퇴계에게 올린 사단칠정설에서 퇴계는 안동 사람으로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영남학파를 형성하고, 고봉 기대승은 이기공발설을 주장한다. 고봉의 설은 율곡 이이에게 전해져 이기이원론적 일원론으로 발전하여 기호학파를 형성한다. 고봉의 사단칠정을 논한 글에 퇴계는 답하고, 가르침에 존경과 고마움을 담아 다시 의문점에 대하여 묻고, 때로는 자기주장을 내세운다. 

   “뒤에 오는 학자들은 단지 그 변론의 자세함과 소략함에 따라 되풀이 연구함으로써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하려고 해야지, 한갓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대략 이해하고서 진리는 바로 이것뿐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라는 글에서 고봉의 학문하는 자세를 볼 수 있다. 때로는 퇴계의 편지에 대하여 “이곳의 설명이 자못 편치 않게 느껴집니다.”라고 한다. 퇴계와 고봉은 편지와 답글을 세세히 분석하고 절로 나누거나 유목화하여 반론을 제기한다. 

   토론과정에서 상대의 주장이 복잡할 때 내 주장을 하기 앞서 상대 주장을 유목화하고 토론에 임하는 퇴계의 토론 장면을 보면

“첫째, 그대의 말에 본래 잘못이 없는데 제가 착각하여 엉뚱하게 논한 것

둘째,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제 말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

셋째, 그대의 편지 내용이 제가 들은 것과 근본이 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

넷째, 근본은 같지만 다르게 나아간 것

다섯째, 의견이 달라서 끝내 따를 수 없는 것

   대체로 이 다섯 조목으로 나누어 아래와 같이 조목별로 적습니다.”라는 식이다. 또한, “진정한 강직함과 진정한 용기는 기세 높여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의義를 들으면 바로 따르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라고 학문하는 자세를 밝힌다.     


   조선의 편지는 공무로 오가는 지인들이나 심부름을 맡은 종들을 통해 전달됐다. 한번 내뱉고 나면 붙잡아 놓을 길 없는 말이 아니라 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편지는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놓은 좋은 방법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선비들은 모두들 편지를 소중하게 생각했고 또 잘 보관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에서 시와 함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편지였다. 고봉과 퇴계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화석처럼 굳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조선의 성리학적 유교 질서도 이와 같은 적응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된 역사의 산물이었다. 고봉과 퇴계 간 논쟁은 뒷날 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다루어지면서 주리론과 주기론의 사상적 대립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의 편지는 조선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퇴계는 거의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당대 제일의 성리학자로 인정받았는데 그 비법은 배움에 임하는 끝없는 열린 자세다. 그는 손자뻘에 해당하는 고봉이나 율곡으로부터도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학우라고 부르며 그들과 도학을 논하는 것을 기뻐했다. 퇴계는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자리에서 선조에게 고봉을 학문하는 선비로 중하게 쓰도록 천거했다.



P.S. 2017.03.10에 쓰고 2024년 3월에 고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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