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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Mar 27. 2024

지적호기심을 만족시킨 책, 포스트 워 1

포스트 워 1945~2005  1권

서평이 아니다. 5,300자로 내용이 길지만, 흥미있다.


   『포스트 워 1, 2』는 1945년 이후 유럽의 역사를 다룬다. 2010년 1월에 사두고 묵힌 책이다. 분량이 많아서인가. 손에서 먼 곳에 꽂아 둔 것 때문인가. 1권은 꽉 찬 734쪽 분량이고, 2권은 1,446쪽이 끝쪽이다.

    그리스, 로마, 중세, 근대의 유럽사는 엉성하나마 배운 게 있다. 과문한 탓에 최근 유럽 현대사를 묶어 살펴본 역사책은 귀하다. 20세기 후반의 유럽 역사를 한 사람이 통합해서 낸다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볼 때, 저자 토니 주트의 노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2차 대전 이후 폐허를 딛고 일어서 2005년까지의 유럽 역사를 ‘2차 대전의 결과’, ‘냉전의 기원’, ‘유럽 제국주의의 종언과 식민지 해방’, ‘유럽공동체의 탄생과 발전’, ‘서유럽의 경제적 번영과 불만’, ‘소련의 동유럽 지배와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 발칸 전쟁’, ‘난민과 불법 이민 노동자’, ‘스포츠, 음악, 영화’ 등의 유럽인들의 일상적인 삶을 포함해서 다룬다. 백과사전처럼 넓은 범주를 다루기에 생소한 내용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裏面을 볼 수 있다. 작은 글자 크기에 빽빽한 텍스트가 독자를 질리게 하기도 한다.      


   『포스트 워 1』은 1부 전후 시대 1945~1953, 2부 번영과 불만 1953~1971년 까지를 다루고, 『포스트 워 2』는 3부 퇴장 송가 1971~1989, 4부 몰락 이후 1989~2005와 에필로그를 싣고 있다.      

지적 호기심은 역사의 裏面과 분기점, 처음 알게 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게 이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가 만든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을 소재가 있고, 러시아 영화, 독일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의 승리 비용이 독일의 패전 비용보다 많았다. 서유럽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전망이 주로 미국의 원조(그리고 압력) 덕분에 제거되었다. 변화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부 전후 시대 1945~1953

   사실상 독일의 민간인들은 1944년에나 가서야 전시의 제한과 부족의 충격을 느끼기 시작했다. 로마, 베네치아, 프라하, 파리, 옥스퍼드 등 고대와 근대 초에 유럽의 중심이었던 유명한 도시들은 비공식적 동의나 요행으로 타격 목표에서 제외되었다. 전쟁 초기 독일의 폭격기들은 로테르담과 영국의 산업도시인 ‘코번트리’를 폐허로 만들었다. 가장 큰 물질적 피해는 1944년과 1945년 서방 연합군이 미증유의 폭격 작전을 수행하고 적군이 스탈린그라드부터 프라하로 가차 없이 진격할 때 발생했다. 

   나치는 서유럽인들을 어느 정도 존중하여 대했고, 서유럽인들은 비교적 독일의 전쟁 수행을 망치거나 방해하지 않음으로써 이에 보답했다. 이 문장은 미국 중심으로 세계 대전을 이해한 사람에게 쇼크다. 동유럽과 남동부 유럽에서 독일 점령군은 가혹했고, 파르티잔 투쟁과 소련의 진격이 가져온 물질적 결과는 서유럽과는 전혀 다른 초토화였다.

   2차 대전에서 민간인 1,900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전체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었다. 군사적 손실로 최대 피해는 소련으로 860만 명의 무장 남녀를 잃었고, 독일군 사상자는 400만 명, 이탈리아 40만 명, 루마니아 30만 명이 죽었다. 모든 사망자를 계산하면 폴란드는 전쟁 이전 인구의 1/5을 잃었다. 교육받은 주민들의 사망 비율이 높았는데 나치의 의도 때문이다. 소련의 인적 피해가 가장 컸음에도 우리 역사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소련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봐야 한다. 

  

소련이 점령한 동부 유럽에는 중세 시대부터 독일인들이 널리 퍼져 살았고 이 지역을 독일 제국으로 편입시키려는 나치의 계획이 있었다. 나치는 ‘라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스탈린과 히틀러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 약 3,000만 명을 거주지에서 몰아내 이주, 추방, 강제 이송을 통해 전국 각지로 분산시켰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하게 되어 동유럽에 흩어져 정착했던 독일인들은 패주 하는 독일군과 함께 독일로 이주해야만 했다.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민족적으로 훨씬 동질적인 국가들로 구성되게 된다.

   1차 대전이 종결되며 사람들은 살던 곳에 계속 살았던 반면 국경선은 다시 만들어지고 조정되었다. 1945년 이후 일어난 일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서방의 정책 입안자들은 주민 이동을 아주 쉽게 묵묵히 받아들였다.

   독일의 점령은 노르웨이를 겨우 806명의 행정관료로 관리했고, 프랑스인 1,500명의 관리와 6,000명의 독일인 경찰과 헌병으로 프랑스를 관리했다. 네덜란드도 같은 방식이 적용되었으나, 유고슬라비아만 파르티잔을 저지하기 위해 독일군 사단이 주둔했다.


   해방된 유럽 정부들은 부역자 처리를 두고 딜레마를 겪었고, 무정부적인 보복 폭력과 인가받지 않은 숙청과 살인이 있었으나, 결론은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와 해방에 대한 환상과 희망이 사라졌다.      

  소련의 계획 경제 때문에 2차 대전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완전한 오해다. 유럽에서 계획과 입안의 유행은 1945년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계획경제학은 1930년대에 경지 침체와 불황, 보호 무역주의, 실업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1차 대전 후 회복 전략에서 시작되었고, 복지국가의 탄생 배경도 같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둘 다 사회적 절망이, 부자와 빈자를 가르는 엄청난 간극이 키워낸 것이다.

   마셜계획은 과거와 전혀 다르게, 미국의 원조를 받을까 말까를 유럽인이 판단하도록 했고, 수년간에 이루어진 원조는 재난 기금이 아니라 복구와 성장을 위한 전략이었으며, 원조금의 규모가 매우 컸다. 서유럽에 제공된 마셜의 원조는 유럽 정부들이 장래의 투자 필요성을 미리 계획하고 계산하도록 만들었다. 마셜 플랜은 경제 프로그램이었으나, 이를 통해 모면했던 위기는 정치적이었다.

    2차 대전 후 영국이 우려한 것은 소련이 독일까지도 자신의 세력권에 포함해 대륙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것이었기에 독일을 분할 점령한 것이다. 또한, 영국은 소련의 공격보다 미국이 유럽에서 발을 빼는 것을 걱정했다. 2차 대전 후 소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 제도를 고집한 것은 소련의 새로운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파르티잔만이 독일과 이탈리아 점령군에 대한 저항에서 성공했다. 티토가 지도자였고. 1950년 6월 25일에 김일성의 남한 침공을 지원한 일은 스탈린의 가장 중대한 오산이었다(p.256) 1950년대 말, 독일의 산업 기계를 최대로 가동한 것은 쉬망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텍스트로만 봐서는 이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독일에 유학을 다녀와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2차 대전 후에 고기, 설탕, 의복, 가솔린, 외국여행, 심지어 사탕까지도 배급되었다. 전쟁 중에도 없었던 빵의 배급은 1946년에 시작되어 1948년 7월까지 지속했고, 1949년 11월 5일 통제가 끝났으나 그 통제들 중 여럿은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아 재차 강요되었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 공산당에는 상당히 많은 유대인 당원들이 있었다.     

   1950년이면 미국의 문화적 교류와 정보 제공 프로그램은 미국 정보부가 종합적으로 관장하였다대부분이 서유럽 엘리트 지식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기 위한 싸움에 돈을 썼다. 1955년이면 유럽에 69개의 아메리카 하우스를 설립하고 강연과 회합영어교실을 주최했다마셜 플랜 시기에 영어책 1억 3,400만 권을 보급했다중국이 세계 여기저기에 공자학원을 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소련은 서유럽 주민 대다수의 공감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급속하게 기반을 잃었다.     


2부 번영과 불만 1953~1971

    서유럽은 스탈린이 사망하고 한국 전쟁이 종식되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정치적으로 대단히 안정된 시기에 진입했다. 유럽경제공동체는 참여국가들이 스스로 유럽의 쇠퇴를 인정한 데서 출발했다. 영국은 자국의 처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가입을 꺼렸다. 수출의 장려, 사양 산업에서 새로운 산업으로의 자원 이동, 농업이나 운송 같은 유리한 부문의 지원에 국가 간 협력이 필요했다. 서유럽의 어느 나라 경제도 자급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 간 협조적 추세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적 이익의 추구였지 쉬망의 석탄철강공동체 기구가 아니었다.

   서유럽에서 히틀러의 패망에 뒤이은 30년은 실로 ‘영광스러웠다.’ 엄청나게 빠른 경제 성장에 놀라운 번영의 시대를 누렸다. 유럽의 통합과 노동자의 생산성 증대가 경제 혁명에 결정적이었는데, 노동의 성격이 영구히 변했다. 농촌인구가 도시로 몰리게 되어 농업인구가 급감하고 2, 3차 산업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1955년 프랑스에서 르노 자동차 노동자들은 생산성 협약 체결에서 임금인상이 아닌 3주간 유급휴가를 얻었는데 이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 대규모 인구이동은 농촌에서 도시로, 유럽 내의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던 독일 등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아직 시장에 진입하지 못해 부족한 노동 수요는 외부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 노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임시 체류자였으나 실제로는 영구히 고국을 떠났다. 영국은 비유럽 이민 억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단기 체류자, 국가 간 이주자, 국내 이주자, 해외에서 유럽에 들어온 이주자 약 4,000만 명이 없었다면 대호황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산이 아닌 사회적 증가로 ‘인구의 보너스 시기를 맞는다. 1960년대 구매력의 증대는 슈퍼마켓을 등장시켰다. 1950년대 중반에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 전기가 공급되면서 냉장고가 대중화되고 세탁기도 유행했다. 유럽의 번영을 측정할 수 있는 단일 척도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가정용 자동차가 촉발한 혁명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가 되면 자동차 소유는 눈부시게 증가한다. 1960년대에 철도의 중요도는 현저하게 낮아지고 자동차 도로교통의 비중이 커졌다.

   1950년대에 독일이 경제 기적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30년대의 회복이 있었다. 나치는 통신, 군수, 운송 수단 제조, 광학, 화학, 엔지니어링, 비철금속 등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에 투자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뜻밖에 20년 후에 찾아왔다. 전후 독일 재계와 정부 고위직에 올랐던 많은 관리자와 계획가들은 히틀러가 통치할 때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이었다.

1960년대 유럽 사람들은 구조주의에 매력을 느꼈으나,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사에서 개인과 개인의 창의성이 지니는 역할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부정했던 사람들이었다.     


『포스트워 1945~2005 1권』은 플래닛에서 2008년 6월 1판 1쇄로 내놓았고 내가 읽은 것도 1판 1쇄 본문 734쪽 분량이다. 이 책을 읽으며 소개된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을 본다.    

 

P.S. 2014.03.26. 에 쓰고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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