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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Mar 28. 2024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킨 책, 포스트 워  2

포스트 워 1945~2005  2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홀가분하다. 『포스트 워 1945~2005 2』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60년간의 유럽 현대사를 막대한 분량으로 풀어놓는다. 저자 토니 주트의 연구 성과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럽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어떻게 줄어들었는가?’, ‘유럽인에게 유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유럽연합의 성격은 어떠한가?’, ‘공산체제 몰락 이후 동유럽은 어떤 상황인가?’,  ‘유럽이 얼마나 다양한가?’, ‘유럽인의 생활양식은 어떻게 정리할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에 이만한 책은 드물다. 

『포스트 워 1945~2005 2』는 3부 퇴장 송가(1971~1989), 4부 몰락 이후(1989~2005)와 에필로그, 추천도서 등으로 구성된다. 추천도서 목록이 60쪽 분량이다.    

 


3부 퇴장 송가 1971~1989

   1970년대 유럽의 경기후퇴는 1971년 8월 15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것과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이 원인이다. 변동 환율 제도와 석유 가격 인상은 전례 없는 불확실성의 요인이 되었다. 1970년이면 유럽에서 농업의 잉여 노동력이 도시의 생산적 산업으로 옮겨간 대이동이 끝난다. 제조업 경제가 소멸하고 있었으나 북지 국가 제도 덕에 국민은 저항을 자제한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사이공의 함락은 미국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으나 소련은 세계 최대의 석유 생산국으로서 중동 위기를 잘 벗어났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가 영어로 출간되고, 베트남 ‘보트 피플’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의 부활은 결코 없으리란 게 확실해진다. 바스크, 코르시카, 북아일랜드 등지의 분리운동이 격렬했다. 유럽에서 ‘정신의 삶’이란 측면에서 70년대는 가장 절망적인 시절이었다. 70년대의 문화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을 향했다. 여성 운동, 환경 보호 운동, 평화운동이 새로운 정치 집단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다.     

   

   빌리 그란트가 이끄는 서독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상호 접근을 통한 변화’라고 부르며 외교적, 제도적, 인간적 교류를 통해 얄타 협정을 극복함으로써 국내외의 동요를 자극하지 않고 두 독일 사이의 관계와 유럽 내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었고 성공한다. 왜 대한민국은 이걸 하지 못하는가? 왜 안 하는가? 햇볕 정책이 왜 그렇게 지탄받아야 하는가? 동방정책의 성공을 위해 ‘서유럽에게는 독일이 동유럽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고, 독일인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주어야 하고, “독소 관계는 당연히 동방 정책의 핵심이었다.”라는 헬무트 슈미트의 말처럼 소련을 달래야 했다.’     


   유럽 연합의 형성과정에서 ‘유럽지역개발기금’과 ‘구조기금’을 빈곤 지역에 투자할 때 비협조적인 중앙정부를 우회하여 지역 세력과 직접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이 효과적이었다. 1970년대 말, 유럽 복지국가는 성공비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50, 60년대처럼 높은 수준이 지속할 거라는, 또 출산율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될 거라는 인구학상의 오산을 인지한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통해 ‘현실 사회주의’는 야만스러운 사기극이며 노예 노동과 대량 학살의 토대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 독재임을 알게 되었다. 소련 진영 국가들은 질적 측면에서 서방의 공업 경제와 경쟁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 경제에 가장 큰 손해를 입힌 결함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초래된 고질적 비효율성이었다. 중앙화 계획의 내재적 결점과 고정가격 제도 때문에 실질 비용을 확인하거나 욕구에 부응하거나 재원의 압박에 적응하기가 불가능했다. 이런 체제가 침체와 비효율은 물론 영구적인 부패의 사슬도 만들었다. 1980년대 공산주의 경제에서 상대적으로 효율적으로 작동한 부분은 첨단 기술의 방위 산업과 2차 경제라고 일컫는 상품과 서비스의 암시장이었다.     


   ‘제1서기 에리히 호네커가 1989년 10월에 치러진 건국 40주년 기념식에서 동독이 경제적 성취에서 세계 10대 국가에 든다고 자랑했을 때, 하객으로 온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남들이 들을 정도로 콧방귀를 뀌었다.’ 동독 공산당은 자신들이 곤경에 처했음을 이해하는 데 더뎠다. 지식인 비판자들도 더 빨리 이해하지는 못했다. 2017년 겨울 박근혜와 참모들도 그랬다. 1989년에 공산주의가 급격하게 붕괴한 데에는 일종의 ‘도미노 이론’ 즉, 타자의 사례가 상황을 결정했고, 누적된 사례가 기존 권위의 정통성을 무너뜨렸다. 텔레비전과 같은 통신수단의 역할이 컸다. 루마니아를 제외하고는 평화로운 혁명이었다. 1989년의 많은 혁명가는 폭력에 대한 혐오를 공유하고 있었다. 동부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서유럽의 풍요와 안전, 자유와 보호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1989년 7월 6일, 고르바초프는 스트라스부르의 유럽회의에서 연설하면서 청중에게 소련이 동유럽의 개혁을 가로막는 일은 없으리라고 밝혔다. 개혁은 ‘전적으로 인민들의 문제’였다. 고르바초프는 몰타 외해상의 순양함 막심고리키호의 전용실에서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시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고르바초프는 1989년의 혁명들을 재촉하거나 조장하기 위해 아무런 적극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지 비켜서 있었을 뿐이다. 1989년의 혁명은 고르바초프의 혁명이었다.     

 

4부 몰락 이후 1989~2005

   1990년 독일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Treaty on the Final Settlement with Respect to Germany)은 9월 12일에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현재 두 독일의 국경선을 향후 탄생할 독일의 국경선으로 공식 인정한 것으로 베를린이 4대 강국의 점령지로서 지녔던 지위는 사라졌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그토록 쉽게 독일의 통일을 허용했는가? 소련 지도자에게 좋은 대안이 없었다. 80억 달러의 배상금과 20억 달러의 무이자 차관을 받고 말았다. 헬무트 콜은 독일의 동부 국경선을 영구적인 국경선으로 인정한다고 맹세함으로써 독일의 실지 회복 정책에 대한 소련과 폴란드의 두려움을 없앴다. 독일은 통일 비용을 세금 인상으로 해결하지 않고 재정적자로 해결한다. 상당한 흑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소련의 소멸은 현대사에서 유례가 없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외국과 전쟁을 하지도 않았고 유혈혁명도 천재지변도 없었다. 거대한 산업국가요 군사 대국이었던 나라가 정말로 붕괴했다. 이유 중 한 가지는 사회주의 사회가 애당초 진정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워싱턴은 공산주의 체제를 ‘파괴’ 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체제는 저절로 무너졌다.     

   슬로바키아인들은 자신들을 슬로바키아인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슬라브어를 말하는 북부 헝가리 농촌의 농민으로 인식했다. 지도를 보면 그렇겠구나 생각할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열은 우연과 상황의 산물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는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영화 ‘Shot Through the Heart’는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친구인 두 명사수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가슴 아픈 이야기.........)이며 그 책임은 독일이나 다른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 베오그라드의 정치인들,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에게 있다.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투르크의 전진을 막는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거점이자 1389년 역사에 길이 남은 패전지다. 티토 사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코소보, 마케도니아, 농촌 지역의 세르비아 지역보다 잘 살았다.      


   독일 연방 정부는 1991년 12월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을 씻기 위해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 서류철을 감독하고 오용을 방지하기 위한 위원회를 설립한다. 국민은 누가 자신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자료가 대중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았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영화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2006 작품에서 볼 수 있다.     


   1987년 단일유럽법 SEA이 공식적 유럽연합의 출발이나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에서 자리를 잡는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에서 유럽 공동 통화, 유로화를 제정한다.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사실 또는 현상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는 주장의 신뢰도를 판단해 볼 수 있는 어림기준(Rule of thumb)이지, 진실을 완벽하게 밝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이 수준에서 유럽연합의 수입은 관세, 농업세, 연합 전역의 간접판매세(부가가치세)와 국민총소득 GNI의 1.24%가 상한선인 회원국들의 분담금이다. 유럽연합의 소득 중 행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 연합 운영비는 순기여국인 영국, 프랑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독일의 분담금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수혜를 받는다. 유럽인을 하나로 결속시킨 것은 ‘미국식 생활양식’과 대비되는 ‘유럽식 사회모델 European model of society’(고 노무현 대통령이 읽던 책의 내용이다)이다. 2등 유럽인이라는 의식은 대체로 옛 공산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프랑스어는 영국, 아일랜드, 루마니아에서만 외국어를 처음으로 학습하는 학생들에게 선택과목일 뿐 과거의 지위는 영어에 내주었다. ‘유럽의 새로운 엘리트들은 아무도 프랑스어를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더 촘촘해지는 유럽 내부의 교통망은 유럽을 하나로 묶는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아 항공 여행보다는 육상 운송이 유리한 과밀한 대륙에서 철도는 지속적인 투자 대상이었다.     

   유럽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고급문화 특히 공연 예술에 국가가 보조금을 계속 지급한다. 유럽 신문들의 영향력은 영국을 제외하면 어디서나 약했다. 동유럽과 이베리아에서 시골 사람들은 신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전자매체 시대로 이행했다. 이 사실은 놀랍다. 20세기말 유럽의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은 나라마다 차이가 없었다. 스포츠 채널인 유로스포트는 다양한 유럽 언어로 방송하기에 전념했다. 유럽을 진정으로 통합시킨 것은 축구였다.     

   


   2차 대전이 끝나고 60년이 지나서 유럽과 미국 사이의 대서양동맹은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은 냉전이 끝나 예견된 것이다. 북대서양 조약기구는 2001년 9월 11일 이후 부시 대통령의 비타협적이고 분별없는 일방주의(‘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다.’), 국제사회의 반대에서 시작한 이라크전쟁 등으로 미국을 확실히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주된 존재로 간주한다. 이제 유럽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다. 두 대륙은 가치에 관한 견해 차이가 심하다. 미국인들의 광신적인 신앙을 대부분의 유럽 기독교들은 이해할 수 없다개인용 권총을 소지한 미국인의 삶은 위험스럽고 무정부적으로 비친다사형제도의 실행 등은 다수의 유럽인에게 미국은 현대 문명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위싱턴의 국제 조약 무시, 지구 온난화에서 국제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편협한 시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당파적 태도 등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 근본적인 문화적 대립이 존재한다.

‘유럽식 사회 모델’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직업의 안정과 누진세, 대규모 사회 이전 지출에 대한 약속은 시민 상호 간의 약속인 동시에 정부와 시민 사이의 약속을 의미한다. 절대다수의 유럽인은 빈곤의 원인은 개인의 무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포스트 워 1945~2005 2』는 플래닛에서 2008년 6월 1판 1쇄를 찍었고 독자도 1판 1쇄 본, 본문 1446(찾아보기 포함) 쪽 분량을 읽은 거다.

노멘클라투라 : 특권적 관료. 키치(kitsch) : 저속한 작품, 사이비 예술     


   미국식 교육으로 알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 유럽과 미국의 가치에 관한 차이 등을 배울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포스트 워 1945~2005 1』에서 다룬 미국 미국정보부가 종합적으로 관장한 문화적 교류와 정보 제공 프로그램, 유학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P.S. 2017.04.06. 에 쓰고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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