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충덕 Apr 20. 2024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지음

   ‘타인의 고통’. 아무리 큰 타인의 고통도 내 손톱 밑에 낀 가시만큼은 고통스럽게 느끼지 못하고 산다. 냉혹한 인간이라 그런가? 내가 겪은 고통보다 절대적 양이 적어서인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포기하거나 눈을 감는 것은 아닌가? 얼마간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을 감고 사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삶이 팍팍해서든지, 이기적이라서 그러하든지.     


   놈 촘스키와 함께 자신이 사는 미국에 대해 몸에 좋은 약은 쓰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수전 손택이다.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활동이 자국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처럼 수전 손택도 미국을 제외한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받는 문학가다. 


   로버트 카파가 찍은 공화국 병사, 데이비드 더글러스 덩컨이 찍은 ‘장진호 전투’, 네이팜 탄으로 불붙은 옷을 벗어던지고 뛰어오는 베트남 소녀와 분신자살하는 스님 사진, 사이공 시내에서 베트콩 용의자의 머리에 권총을 쏘기 직전의 사진 등은 30년도 전에 ‘LIFE AT WAR’에서 본 기억들이다. 그전 사진으로 본 것일 뿐이었다.


   90년대 초반 워싱턴과 시카고에 10여 일을 머물렀다. 동료는 ‘미국인의 비만’이란 주제로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런 관점을 갖지 못했기에 기념사진만 찍어 왔다. 「타인의 고통을 읽어가며」 ‘LIFE AT WAR’의 사진이나 여행에서 찍어 온 인증사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한다.      


우선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 메모를 옮긴다.

스페인 내전(1936~39)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지켜본(‘보도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p.42)

미국이 개시한 베트남 전쟁은 죽음과 파괴의 모습을 가장의 코앞까지 찾아들어왔다. (p.43)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미사일 폭격을 CNN이 실제 중계한 내용은 없다. 

영어 동사 Shot은 ‘총을 쏘다’와 ‘사진을 찍다’란 두 가지 뜻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p.68). 


   전쟁 사진이 태어난 전쟁은 크림 전쟁이었으며, 그 당시의 사진작가는 로저 펜턴이었다.(p.76)

실질적으로, 잘 알려진 사진들이 연출되지 않은 채 찍히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이다. (p.90)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다시 말해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p.112) 하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고종황제 초상화가 인종전시장에 전시됐었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백인들처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충격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적응력을 가진 셈이다. 실제 생활에서의 공포에 익숙해질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이미지가 건네주는 공포에도 익숙해질 수 있는 거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각종 기념관은 1930~40년대의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학살된 사건을 사색하고 애도하던 방식의 산물이다. (p.132) 그런데, 흑인 노예사 박물관은 미국 내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p.133) 


   여기부터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 하고자 하는 뜻이 드러난다. “건국 이래로 사악한 지도자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증명하려는 그런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예외라는 건국 신조가 지금까지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나라의 믿음과 어울리지 않는다.”(p.134). 미국이 솔직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는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p.154) 


아마도 이 문단이 결론이라 생각한다. 

연민에 그치지 말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멈춤도 행동이다.     


   부록에 네 편의 글이 있다. 첫 편인 ‘문학은 자유다’는 ‘독일출판협회 평화상’ 수상 연설이다. 유럽인과 미국인간의 갈등을 풀어 놓았다. 쉽게 보기 어려운 글이다. 특히 미국인들은 적군과 아군이라는 용어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실은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미국에 붙어야 한다는 것이 한반도 운명이라며 정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는 수전 손택의 말은 놈 촘스키의 견해와 같다. 

   수전 손택은 “미국이 과격해진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람들이 흔히 미국이 지닌 보수적 거치의 근원이라 여기는 것, 즉 종교 때문일 겁니다.” (P.202) “미국에서는 종교가 아직도 사회와 공공 담론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식 종교, 달리 말하자면 종교 자체라기보다는 종교를 둘러싼 사고방식에 가까운 겁니다.” (P.203)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P.207)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P.214)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부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