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 저자를 배운 건 수십 년 전이나 읽는 데는 일주일이 필요했다. 일이 많아 책 읽을 시간이 적었던 게 아니다. 반쯤 읽을 때까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라는 생각을 한다. 페이지만 넘기다 읽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포기하기 전에 마지막 절차로 작품 해설(번역자는 서울대 불어불문과 교수 이환)을 읽으니 팡세가 말하려는 골격을 이해할 수 있다.
<팡세>는 1부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인간에 대한 글이고 2부는 신에 대한 글이다. 총 991개의 짧은 문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736개의 短章은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공허, 비참, 권태 등 신 없는 인간 삶은 어둡고 절망적이다. (불신자인 독자의 입장이나, 현대 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거란다.)
1부 끝부분에서 2부 앞부분은 그러면 ‘인간이 비참하지 않기 위해 어찌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철학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2부에서 그에 대한 답으로 ‘신을 믿어라 기독교도가 되어라’, ‘신의 은총에 의지해 구원받아라’는 것이 <팡세>의 결론이다.
파스칼 사후 1670년에 <팡세>가 출간됐다. 당시의 서구 사회가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고 있었고 기독교를 지켜내야 한다는 믿음으로 지은 거란다. <팡세>를 ‘기독교 호교론’이라 평가한다는 것은 작품해설과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된다.
1부 인간을 다룬 부분에서 몇 가지 파스칼의 통찰을 옮겨본다.
3 (여기부터 아라비아 숫자는 번역본인 라퓨마본의 번호임) 문체, 자연스러운 문체를 대할 때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기뻐한다.
5 사람을 유익하게 꾸짖고 그의 잘못을 깨우쳐주려고 할 때는 그가 어떤 방향에서 사물을 보는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방향에서 보면 대체로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옳은 점은 인정하되 그것이 어떤 면에서 틀렸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는 이에 만족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8 한 작품을 만들 때 최후로 깨닫는 것은 무엇을 제일 먼저 써야 할지를 아는 일이다.
14 기독교도들이 불신자와 유대인을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보고 있다(내 판단)
17 하느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니 한국에서 쓰는 ‘중보기도’는 모욕이며, ‘중재기도’라 해야 한다.
58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83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고 단지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항상 행복을 준비하고 있으니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90 클레오파트라의 코, 만약 좀 더 나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표면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 표현이 <팡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가?)
167 인간은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특성만을 사랑한다.
206 시간은 고통과 분쟁 진정시킨다.
215 사유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돌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232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330 여러 가지 경우. 여러 가지 가정에 따라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야 한다.
1. 여기서 영원히 사는 경우
2. [영원히 사는지 아닌지 불확실한 경우]
3. [영원히 살지 않는 것이 확실한 경우]
4. [영원히 살지 않는 것이 확실하고, 오래 사는 것이 불확실한 경우-그릇된 가정]
5. 오래 살지 않는 것은 확실하고 한 시간을 사는지 불확실한 경우, 이 마지막 가정이 우리의 것이다.
343 당신은 이미 배에 올라타 있는 것이다.
이후 신학에 관한 내용은 불신자라는 핑계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에 포함해 번역한 거다. 좁게 봐서 문학이라기보다는 철학, 더 좁게는 논리학 책으로 분류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P.S. 2016.5.8 오전 1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