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지음
책을 사놓고 읽는 순서에 밀려나는 책이 있다. 하나는 원체 재미가 없어 읽어가는 것이 고역인 책 - 마르셀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렇다 - 이 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인데 우리의 삶과 접점이 적다. 다른 하나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 수준의 차원이 높아 엄두가 나지 않는 - 강유원의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이 그러하다 - 책도 있다. 강유원의 강의를 들었기에 초판을 사서 발췌해 읽었다. 발췌독은 꿰지 않은 구슬 같다는 생각에 정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와중에 지인에게 추천까지 했으니 더 미룰 수 없다.
책 읽기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지만, “책 읽기가 지식이 되려면 책을 읽고 난 후 어떤 형식으로든 책에 관한 후기를 써야 한다. 그게 서평이다. 서평은 나를 위해 내가 읽은 책을 갈무리해 놓는다는 점에서 책 읽기의 끝이지만, 그 서평을 내가 다시 읽거나 타인이 공유함으로써 또 다른 책 읽기로 이어 간다는 점에서는 책 읽기의 시작이다.”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책 읽기의 끝과 시작」은 첫째,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주제로 책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논이다. 둘째, 서평의 여러 형식을 소개하며 어떻게 쓸까 하는 고민에 모델을 제공한다. 셋째, 근대와 정치, 그리고 인간이란 관점에서 시대를 읽은 23개 서평을 싣고 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주제 정하기, 저자 파악하기, 표지와 차례 분석하기, 서론 및 헌정사 일기, 단면 자르기,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입장 연관성 갖기, 다시 읽기에 관해 논하고 있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해 한 권의 책에서 특정한 내용을 뽑아서 쓰는 주제 서평, 여러 권의 책들을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역자 후기, 논고를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신문에 공개된 졸고 ‘투키디데스의 함정’ http://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1046
은 특정한 내용을 뽑아서 쓰는 주제 서평이었고,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여행’은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엮는 주제 서평 http://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0629
이다)
‘시대를 읽는 주세 서평’들은 31권의 책에서 23개의 주제를 뽑아 쓴 서평이다. 이 부분은 지적인 책 읽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내용이 쉽지 않은 만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 듯하다. 저자가 말하는 다른 관점에서 ‘ 다시 읽기’를 위해 지적 호기심을 갖게 한 핵심을 요약한다.
「코스모폴리스」, 「홉즈의 이해」, 「신학-정치론」, 「지나간 미래」를 읽고 이를 통해 서구 근대의 기원에 관한 핵심을 서평으로 공개하고 있다. 분량이 14p에 달하니, 독자는 서평만 읽어도 서구 근대의 기원에 관한 논의가 학창 시절에 배운 - 산업혁명과 함께 근대사회가 성립했다는 식의 – 내용이 완벽하지 않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중 1430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채택했던 시점,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 1895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및 회화와 문학에서의 모더니즘의 발흥을 서구 근대의 시작점으로 보는 견해(170. p)를 만난다.
「약속된 장소에서」 이상과 현실에 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 발만 물러나서 생각해 보면 순수한 세계라는 이상주의는 시초부터가 어긋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현실이란 본래 혼란과 모순을 내포하고 성립되는 것이며, 혼란이나 모순을 배제해 버리면 그것은 이미 현실이 아니다.”(204. p)를 보면, 내 생각과 그의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안다.
파테이 마토스(pathei mathos!)는 ‘고통에서 배운다’로 기억할 문장이다.
「열정과 이해관계」의 서평은 탐욕으로 간주되던 금전 추구 행위가 도덕적 사회적 정당화를 어떤 방식으로 획득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서평을 읽은 후 책을 주문하게 한다.
「파르티잔」 서평은 파르티잔의 역사와 정규군을 비교하며 파르티잔이 정규군을 이길 수밖에 없다는 주장과 사례를 담고 있다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서평에서 경제력은 신분 상승의 핵심적 계기였으나 이제는 교육과 지식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등장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단의 민중 반란」 서평은 동학이 대두된 내외적 상황과 이론화과정, 친일 논란, 시천교로의 분파 등을 다룬다. 인내천이 교주 최제우가 아닌 3대 교주 손병희의 이론화에 터 한 것임을 배운다.
부록(344p부터 491p까지)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서평을 실어두었다. 멋지다.
지적인 책 읽기를 시작하려면 읽어보라 권할 책이다.
「책 읽기의 끝과 시작」 정독은 퇴근 후, 「세이노의 가르침」 두 번째 다시 읽기는 e-book으로 근무 중 짬을 내, 존 케리가 엮은 「역사의 원전」도 점심시간에 읽는다. 요즘 세 권을 동시에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신간 <별일 없어도 읽습니다>는 강유원의 서평을 흠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https://product.kyobobook.co.kr/book/preview/S000213587217
P.S. 여러분이 서평을 쓰시겠다고 신청해 주셨습니다. 몇 분 더 모십니다. 6.26(수)까지 신청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