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 지음
7월과 8월에 독서 시간을 줄여야 할 일로 마음이 급하다. 어제까지 마무리하기로 한 책 읽기를 노트에 남겨 매듭을 짓는다. - 2019.7.1. 월 -
김창협의 글을 모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내놓은 <농암집>을 이틀에 걸쳐 읽고 새긴다. <농암집>을 통해 조선 시대 사대부가 지녔던 정신의 깊이와 품격을 만날 수 있었다. 김창협은 후학이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퇴계 이황과 더불어 격을 견줄 수 있다고 평한 17세기 정통 유학자다. 논변, 편지글, 제문, 상소 글, 묘지문,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글 등을 담았다.
하나,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글에서 율곡 이이의 이기일원론과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조목조목 평가한 글에서 후학들이 김창협의 수준을 율곡과 퇴계 못지않게 평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유가의 도를 앞장서서 밝히고 학문이 순수하고 덕을 갖추었으며 성현의 깊고 은미한 뜻을 드러내 후세를 열어 준 공으로 말하자면 정암, 퇴계, 율곡, 농암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p. 322) 이는 18C 말~19C초 오희상이 평한 것이다.
둘, 문장에 대해서 김창협의 시를 읽으면 “마음속이 영롱하고 투명해져서 양생 양생할 만할 뿐 아니라 무병장수하기에도 충분하다. 속세의 때가 낀 오장육부를 깨끗이 씻어내어 세속의 명리를 제거해 줌은 말할 나위도 없다.”(p. 325)
6개 장으로 편집된 <농암집>은 ‘김창협은 누구인가’로 시작한다. 김창협은 병자호란 척화파 대표인 김상헌의 후손으로 숙종에게 아버지와 스승 송시열을 잃었던 서인 계열의 유학자다. 이후 처사의 삶을 살았으나 정교한 사유와 치밀한 논리, 섬세한 언어 구사로 주자학의 단계를 한 단계 심화시켰다고 평가된다. 일제 이후 근대 학문의 시각에서 사라진 17세기 이후 주자학 발전은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성과라 한다. 문장가였고, 탁월한 비평가이기도 하여 18세기 동아시아의 지적 수준의 최고봉에 있었다고 평가된다. 가족사는 슬픔의 연속이어서 부친과 스승은 사약을 받았고, 두 아들과 두 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굴곡진 김창협의 삶에서 “정치적 좌절과 개인적 슬픔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산수와 학문의 즐거움 덕분이었다.”(p.19)
장인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는 것은 근대 교육에서 상정하지 않는다.
책선해 주는 벗이 있어 : 책선 責善이란 잘못을 지적하고 좋은 일을 권하는 것, 부모와 자식 간에는 해서는 안 되고 절교가 가능한 벗 사이에서나 해야 한다.
시험에 떨어진 동생에게 : 분발은 용기를 끌어내고 실패는 성공의 계기가 된다. 분발하지 않으면 용기를 북돋을 수 없고, 실패해 보지 않고서는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갖추지 못한다. 백 걸음 떨어진 곳에서 버들잎은 백발백중할 정도로 치밀하게 공부한 이들과 비교한다면 어림없는 실력이다. 평가 기준에 좌우되지 않을 만큼 자신의 실력을 넉넉하게 키우고 결과에 대한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야말로 인을 행하는 자세이며, 과거 시험공부는 그런 자세를 기르는 과정으로 의미를 지닌다.
성악설 비판 :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맹자를 직접 만나 토론할 기회도 없었고, 또 시대를 내려와 그와 동시대를 살며 설을 듣고 자신의 오류를 철회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
금강산 유람기 :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건 이내 몸이 이 산 안에 있어서라네. (蘇軾)” 금강산을 보고서 반평생 보아 온 산은 모두 흙무더기나 돌덩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다. 18세기 후반 몇몇 가문을 중심으로 증가한 금강산 유람은 18세기 이후 유행한 풍조였다.
환경을 탓한 것인가 환경을 바꿀 것인가 : 처지를 한탄하고 근심하는 것은 뜻을 어떻게 갖는지 달려 있을 뿐이다.
고관 자제의 곤궁한 은거 : 자신이 선택하고 나서 또 그것 때문에 후회한다면, 목욕하는 자가 젖기를 꺼리고 불 쬐는 자가 뜨거움을 꺼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부귀와 빈천 역시 그저 거기에 맞춰 적절하게 대처하면 되는 일이다. 문제는 이를 편안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다.
나귀를 빌려주어 고맙네 : ‘건네준 솜옷만도 따스하다’- 범저와 수가의 고사
자신의 깨달음이 없으면 : “사람의 마음은 잠시도 놓아서는 안 되니, 욕심이 일어날 때를 만나면 반드시 철저하게 이겨 내야 한다. 이는 뱃사공이 배를 젓다가 험한 여울을 만나면 반드시 온 힘을 다해 저어 올라가야지 조금도 밀려서는 안 되는 경우와 같다. 조금이라도 밀리면 바로 수백 수천 보를 떠내려가 다시는 위로 올라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이곳을 지나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p. 93)
祭亡妹文 : 네가 오래 살고 복을 누리리라는 것을 마치 어음 가지고 가서 꿔 준 돈 받는 것처럼, 좋은 곡식 심어 두고 가을걷이 기다리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 : 평소에 제대로 가르치고 양성하지 않으면서 나이가 차기도 전에 관례를 올리고서는 관례만 끝나면 바로 어른으로서의 덕이 완성되기를 바라니 이렇게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른이 사라지고 ‘어른다움’의 의미도 퇴색해 가는 오늘.
慶筵講義 : 임금이 질문하지 않는 것에 관하여. Q: 왕의 학문이 높아 남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서? A: 안연의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 질문하고, Q: 신하의 학문이 보잘것없어서 질문할 가치가 없어서? A: 종을 두드리면 두드리는 대로 소리가 나듯 자꾸 던지다 보면 그래도 그것이 촉발하여 깨닫는 실마리가 있을 수도, Q: 애초에 의문점을 보지 못해서? A: 만약에 의문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문점을 아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일 뿐, 만약 이와 같다면 매일 경연을 한다 해도 끝내 학문의 진보가 없을 것.
어리석은 뒷집 부인의 충고 : ~. 그러나 ~. 하지만 ~. 이제 ~.
아버지의 묘표를 스승에게 부탁하다 : 김창협은 사약을 받은 아버지의 묘표를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한양으로 압송 중이던 때에 작성하고, 송시열은 장성에서 묘지문을 지었다. 닷새 뒤 송시열은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으니 김수항의 묘지문이 송시열의 마지막 유작이다. 평상심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김수항, 그리고 자신 역시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먼저 간 동지의 묘지명을 써 주는 송시열의 모습에서 오늘날 쉽게 만나기 힘든 거대한 인간상을 마주한다. (p. 171)
마음을 잠재우다 : 그림자를 없애고 거울에 비친 상을 없애고 싶다면 잠들어서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
폭포를 찾아서 : 아름다움이란 본디 사람에게 쉽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모양이다.
벼슬할 수 없는 이유 : 엄정한 형식과 치밀한 논리를 갖추면서 ‘감정의 절절한 토로’와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기’가 조화를 이룬.
아버지 대신 지은 동생의 묘지명 : 어떤 슬픔은 더 큰 슬픔 앞에서 차라리 즐거움(슬픔이 한없이 증폭된다)
조선의 문장을 평하다 : 구상에 기초하고 구조를 수립하며, 제재를 연결하고 수식을 덧붙이며, 마지막으로 법칙과 규례에 엄격하게 맞추었다.
시 벗 아들을 잃다 : 내 모습이 가지 없는 썩은 나무 같고, 불기 없는 재와 같다. 이런 삶에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냐? 그런데도 배고프면 밥을 찾고 추우면 옷을 찾고 병이 들면 약을 찾으면서 구질구질하게 수명을 연장해 왔으니, 나의 무딤이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지나치게 슬퍼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생각이야 어찌 안 할 수 있겠느냐? 천명과 인사는 본디 어쩔 수 없는 것. 덧붙일 말을 잃을 만큼 슬프다.
퇴계와 율곡을 넘어서 사단과 칠정을 논하다 : p.283~291에서 이이와 이황을 보완하다,
청의 지배와 중화 문명 : 가문이 척화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청나라가 이적의 나라라고 해서 그 학술 문화마저 무시하고 아예 보지 않으려는 편협하고 경직된 시각을 넘어서서, 오히려 우수한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찾아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의식을 가졌다.
조선의 학자를 평하다 : 허심탄회하게 이치를 보지 않고서 다만 先儒의 설로써 남을 압도하여 입을 열지 못하게 한다면 강학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농암집>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16년 8월에 338쪽 분량으로 새 옷을 입혀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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