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과 글이 넘쳐난다. 쓸모없는 텍스트를 생산하지 말아야 하는데 나마저 생각과 실제가 다르다. 그만큼 '어떻게 살 것인가'는 생명의 유한성을 인식하는 인간이라면 버릴 수 없는 화두다. 생명의 유한은 육체적인 사망 뿐 만아니라 사회적 죽음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에 사두고 읽기를 미뤄두던 책을 읽었다.
책을 살 때는 몽테뉴가 쓴 인생론이거니 했었다. 16세기 프랑스인이었던 몽테뉴 작품인 에세(Essais)를 그의 삶의 여정에 따라 21세기 작가 사라 베이크웰이 풀어놓은 작품이다. 시작은 지루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잔잔하게 편안함이 스며드는 느낌을 준다. 학창 시절 몽테뉴는 수상록이라고 외웠던 것 말고는 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나에게 인생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나이가 들어가는 이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이 다행이었다.
몽테뉴는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로, 보이는 대로 기록한, 말 그대로 에세이라는 장르를 연 사람(철학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이다. 본문의 수많은 구절들이 “그래, 그래”하면 맞장구치고, 많은 독자들이 몽테뉴의 에세(Essais)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내용을 접하면서 에세(Essais) 완역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수년 전 서울대 출판부에서 완역본은 낸 적이 있으나 절판된 상황이라 아쉽다. 헌책방이라도 뒤져봐야겠다는 생각이다.
헌책방 고구마에 다녀와야겠다.
옮겨 적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몇 가지를 쉽게 보도록 적어본다.
결국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결점을 지낸 채 살아가고 결점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다.
내가 고양이를 보는 것처럼 고양이도 나를 본다.
내 마음이 확고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면, 나는 에세이를 쓰지 않을 것이고 확고한 결론을 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늘 수련 과정에 있고 시험 대상이다.
우리와 우리의 판단, 그리고 언젠가 죽을 운명을 타고나는 것들은 모두 쉴 새 없이 흘러가고 굴러다닌다. 그러므로 한 사물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물을 확실하게 규정할 수 없다. 판단하는 존재나 판단되는 존재가 모두 지속적으로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스무 개의 목차만으로도 충분히 생각할 거리를 준다.
혼란스럽고 가치관이 흔들리고,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는 스토아 철학의 평정심을 생각한다.
내가 읽은 책은 [책 읽는 수요일]에서 2012년 2월 초판 4쇄로 펴낸 것으로 법학을 전공한 전문번역가 김유신이 옮긴 것이다. 분량 502쪽
P.S. 2012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