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 지음
2019. 10. 27. 일
<인문학은 밥이다>로 만난 김경집 님의 인문 에세이 <인생의 밑줄>을 읽는다. 아직은 에세이를 읽을 나이가 아니라 믿고 산다. ‘김경집의 인문 아포리즘’이란 글이기에 선택했다. ‘지적 산만함’의 완성은 아무나 지니는 게 아니라는 작은누나의 말에 공감하며 읽는다.
나에게 남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가 만든 잠언을 눈감고 읽어본다.
나머지는 잊더라도 기억할 여섯 가지다.
① 굴욕은 견뎌내면 디딤돌이 되지만 굴복하고 타협하면 끝내 부끄러운 비문(碑文)이 된다.
②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깨뜨리는 것, 두렵기는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끝내 포기하지 않는 꿈이 갖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다.
③ 그저 줄인다고 단순해지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걸 알아야 쓸데없는 걸 버릴 수 있다.
④ 나이 드는 게 아니라, 생각이 낡아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싱싱한 생각으로 진화하면 그깟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⑤ 논리와 근거가 확보되었을 때까지 말을 아끼는 것, 그것이 철학적 태도의 핵심이다.
⑥ 몸은 노쇠할 수밖에 없다. 정신은 시대정신과 미래 의제를 고민하며 열려있는 한 녹슬지 않는다. 신체의 늙어감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정신이 낡고 퇴행하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
프롤로그
힘, 돈, 앎의 너비와 깊이는 다소 다를지라도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자연에 순응하고 조화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낭만적인 삶일 거라는 문장에서 량수밍을 문화의 적응을 떠올린다. 젊음은 의무의 삶이고 중년은 권리의 삶을 산다. 지혜를 누릴 시간이라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I am not what I was)
제1부 깨뜨려서 지키는 삶
내 안에 뿌리 박힌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적이다. 상처를 받기도 전에 상처를 입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미리 물러설 마음의 통로를 찾는다. 그게 인생 비극의 시작이라면 결국 그 비극은 내가 만드는 셈이다. 멈춰 있지 않으면 새로운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말 잘 듣고 안전하게 사는 법을 배워 산다면 표절의 삶이다. 그런 삶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다. 혁명은 기존의 낡은 질서와 제도, 방법을 깨뜨리는 것(나이팅게일과 샤넬의 삶). 내가 혁명의 삶을 살지 않았다고 남의 삶의 혁명을 가로막는 건 월권이다.
도전은 청춘만의 몫은 아니다. 중년은 은퇴라는 저격수의 매복을 피해 삶을 대전환해야 할 도전과 맞서야 한다. 도전 성공 확률이 1%라도 로또 당첨 확률보다는 높다.
열정은 언젠가는 식고 사윈다. 그러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깊어지고 길어진다.
부러워하기만 하면 끝내 못한다. 이제 ‘저지르는 일’이 두려운 것도 없지 않은가(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두려운 것은 늦은 나이가 아니라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자기 비하 때문이다. 석 달만 참으면 어느 정도 수준에 달한다. (저자의 수영)
삶이란 눈길을 걷는 것이다. 또렷한 흔적이 남기에 함부로 밟을 수 없는 길.
스콧 니어링 : <전쟁: 계획된 파괴와 대량 살상>으로 전쟁이 그들에게 명성과 권력과 부로 통하는 명예롭고 신속한 길이자 대내외 정책을 결정하는 데 사용하는 주 무기라는 점을 찾아내기까지 끊임없이 물었다. 이는 <전쟁은 사기다>를 쓴 스메들리 버틀러와 같은 생각이다.
플라톤도 공자도 내가 아니다. 철학자를 먼저 찾기보다 내 문제를 먼저 던져야 한다. 질문하는 나 자신이 먼저다. 결국 내가 ‘묻는’ 행위가 바로 철학이다.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어른의 삶이라고 어찌 방황하지 않겠는가. 흔들려도 불안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힘이 후반부 삶의 방황을 버텨내고 이겨내게 할 것이다. 오늘은 살아온 삶에서 가장 늙은 시간이지만 살아갈 삶에서 가장 젊은 시간이다. 어찌 평탄한 길만 있을까. 오르막 내리막 곧은길 굽은 길 가는 거다. 가다 보면 그곳에 다다를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을 향한 태도” 내가 나에게 굴복하지 않는 힘을 키워야 부당한 외부의 강요에도 저항하고 맞서 싸울 수 있다.
솎아내야 할 것을 때맞춰 제거하지 않으면 전체를 버려야 할 시간이 온다.
배움의 시작은 타인으로부터, 배움의 완성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진다. 배움의 가장 큰 또 다른 기쁨은 독립이다. 무지하면 어쩔 수 없이 남의 말을 따른다.
고독은 쓰리고 아프고, 외롭고 쓸쓸한 게 아니다. 온전히 나에게 몰입하고 내면에 말을 거는 완벽한 충실함이다. 고독은 내가 온전히 나의 주인이 되는 조건이다.
제2부 오름 같은 사람이라면
말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 근거인 로고스, 정서적 호소와 공감인 파토스, 화자의 신뢰성인 에토스가 필요하다.
지금 내가 누리는 권리는 언제 어디선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얻은 선물이다. (여성참정권: 에밀리 데이비슨, 에멀린 팽크허스트) 우리는 다음 세대에 무엇을 마련해 줄 것인가.
누구나 힘겨운 이를 겪는다. 그러나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가치를 지켜낼 때 그의 삶에 향기가 담긴다.
자식이 내게 준 기쁨과 환희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살아온 세상에 맞춰 아이를 재단하지 말 일이다.
아침의 햇살과 저녁의 햇살이 다르듯 사람도 그렇다. 늘 일관적이라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無變應變) 나중에 시니어 독서 클럽을 만들자.
남이 알아주는 것으로 내 삶이 좌우될 수 없다.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서슬 퍼런 칼은 단칼에 자르는 매력이 있지만, 그날에 제 살도 벨 수 있다.
끈 떨어진 추사에게 변함없이 존경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상적. 셈이 앞서 사람을 잃는 것보다 안타까운 건 없다. 때로는 내 삶의 가치가 그런 사람의 존재 유무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러나 모든 죽음의 가치가 동등한 것은 아니다.
제3부 기계의 시간에서 자연의 시간으로
마르틴 하이데거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어휘 하나가 삶의 질을 결정하기도 한다. 나잇값을 하려면 그에 걸맞은 언어의 품위를 지녀야 한다. 말이 예의를 벗으면 그 인격이 발가벗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본질은 잊고 거죽만 보는 일에 나를 몰아넣는 건 매우 느린 속도의 자살이다. 삶이건 일이건 ‘어떻게’를 묻기 전에 ‘왜’를 먼저 물어야 한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계속 유보한다면 행복은 영원히 접근 불가의 영토로 고립된다.
큰 욕심 내지 않는다면 사는 데 크게 지장 없을 수 있다. 위축될 까닭이 없다.
인심은 지갑에서 나오지 않는다. 배움의 창고가 넉넉해도 저절로 나온다. 그게 인격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피해를 답보한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돈에 굴복하는 법을 먼저 배우기 때문이다. 지혜와 여유는 같은 집에 사는 가족이다.
상대가 만만하게 들어오지 못하게 빈틈없이 보이는 건 내가 나갈 출구도 함께 틀어막는 것이다.
명료한 게 최상은 아니다. 때로는 어중간도 있다.
모질게 살 것 없다. 균형만 잃지 않으면 된다.
설렘이 없으면 삶은 단순히 의무가 된다.
조지프 코클린 교수의 말은 다른 관점이 갖는 통찰이다. : ‘장수 경제’ 개념 창시자. “인류 역사에서 이렇게 많은 고학력의 자본력을 갖춘 노인이 출현한 적이 있는가?”
<인생의 밑줄>은 한겨레 출판에서 2019년 9월에 본문 303쪽 분량으로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