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세기, 진나라 통일 9년째, 승상 이사가 진시황에게 진나라에 관한 기록이 아닌 모든 기록과 시경과 서경, 제자백가의 저서를 불태우고, 의약·점복·농업에 관한 실용서와 법령을 제외한 모든 기록과 서적들을 없애자 건의했다. 진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한다. 분서갱유를 말한다. 6세기,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지식이 신앙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유로 로마 도서관을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7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640년 정복자 이븐 알 아스에 의해 파괴되는데, 도서관의 책들은 인근 공중목욕탕에 나눠주고 불쏘시개로 쓰게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제외하고 불타는 두루마리는 알렉산드리아 목욕탕 물을 여섯 달 동안 덥혀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불태웠다는 설도 있고, 고대 역사가들은 카이사르가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조선 말기 매천 황현의 기술에 따르면, 고구려의 사서를 당나라군이 불태웠다고 기록했다. 20세기 한국에서 제5공화국을 만든 전두환은 1980년 언론통폐합을 실시하고 모든 언론 보도를 검열했다.
언급한 다섯 가지 역사적 사실의 공통점으로 책과 권력의상관관계를추론할 수 있다.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는 책이 조선왕조 500년을 어떻게 관통했는가를 탐구한다.첫째, 저자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둘째, 인쇄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 셋째, 책이 성리학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 도구로 사용된 사실, 넷째, 책이 드러낸 성과들, 다섯째, 조선 지식인들이 독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여섯째, 조선이 품지 못한 아쉬운 것들을 살펴본다.
첫째, 저자 강명관의 문제의식은 금속활자로 만들어 낸 책이 어떤 역사적 역할을 했는가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고려와 조선이 어떤 책을 찍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의도에서 책을 콘텐츠를 쓰고, 책을 만들고, 보급하고 소유했는가?라는 당연한 질문에 관한 탐구다.
둘째, 인쇄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목판 인쇄는 단 1종의 인쇄물을 얻는다. 금속활자는 대량인쇄가 가능하다. 조선조에서 금속활자는 소량인쇄에 이용하였다. 정도전의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를 썼으나 금속활자가 활용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1395년 <대명률직해>가 목활자로 인쇄되었는데 이두로 구결을 소상히 달았다. 1400년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제작하였다. 태종 이방원이 만든 것은 계미자였고, 9개월 만에 수십 만자의 활자를 제작했다. 1410년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주자소에 명하여 서적을 인쇄해 팔게 했다. 세종은 갑인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쇄했다.
정조는 책을 탄압한 호학의 군주였다. <홍재전서>를 남긴 정조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을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따라 완벽하게 작동되기를 원했다. 서양 서적, <금병매>, 소품, 고증학을 이단적 사유로 보고 문체반정으로 사상을 통제했다. 문체반정이란 된서리를 맞은 <열하일기>는 당대에 인쇄되어 유통되지 않았다.
셋째, 책이 성리학으로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 도구로 사용되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윤리로 조선의 모든 인간을 윤리적 인간으로 만들려 하였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기묘사림은 소학, 삼강행실도 등 막대한 분량의 다양한 윤리서를 찍어내 보급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았다. 이 모든 윤리서적은 <소학>에 근원을 두고 있다. <소학>은 인간의 일생과 일상을 구체적으로 제약한 규범이었다. 중종은 <소학> 1,300부를 찍어 관료와 종친에게 나누어주었다. 사림들은 당쟁에 희생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정계에 복귀한다. 소학도 부활한다. 그렇다고 도덕적 사회가 된 것은 아니다. 당쟁이 시작됐다. 그들 역시 과거 부패한 정권과 다르지 않았다.
넷째, 책이 드러낸 성과로 퇴계는 성리학의 이해를 위해 100권의 <주자대전>을 탐독하고 48권에 이르는 주자의 편지를 훑어가며 주자 당시의 송대 지식인과 송대 역사에 대해 정밀하게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퇴계는 <주자서절요>를 지었고, 1561년에 20권 10 책으로 처음 간행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간행되어 주자학으로 들어가는 가장 보편적인 문이 되었다. 이후 봇물 터지듯 제자들에 의해 관련 서적이 쏟아졌다. 21세기 퇴계학이 학문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20권으로 당시 중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독서와 메모의 축적이 새로운 저술로 나오게 된 거다. 명나라 사람 정효가 1599년에 저작한 <오학 편>을 인용한 것이다. 명나라 사람이 지은 <속이담>이란 책을 읽고 최초로 천주실의를 언급하기도 하였다. <곤여만국전도>와 책을 통해 서양을 인식했다. 사신으로 갔다가 북경에서 안남, 유구, 타일랜드 사신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고 한시를 주고받았다. <지봉유설>은 유서(類書 :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지식을 유사한 내용끼리 묶어 분류해서 묶은)다. 성리학이 성과 理, 氣 같은 관념의 조작에 몰두할 때 이수광은 현실의 구체성을 다뤘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방대한 사전이다. 30권 30 책, 3,000개 항목을 담았다. <성호사설>도 유서류의 저작이다. <지봉유설>과 다른 점은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이 사람의 본성을 해친다는 등 사회비평을 담고 있다. <성호사설>은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인보 등 사회를 고민했던 양심적 학문의 계보를 만든다.
서유구는 경화세족으로 장서구축은 그들의 문화였다. 서유구의 가문은 18세기 후반 북경발 신학문을 수용한 최고 수준의 학자 가문이었고, 훈육을 받을 수 있었다. 사직 후 18년간 학적 노동의 결과로 113권 52 책의 <임원경제지>를 남겼다. 전원에서 품위 있는 삶, 자족적인 삶을 위한 방법을 담고 있다. 900여 참고자료에서 찾아낸 자료로 구성한 책이다.
다섯째, 조선 지식인들이 독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율곡 이이의 독서예찬에서 엿볼 수 있다. <자경문>에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일을 행하는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일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라고 정의한다. 일하지 않으면 책을 읽고 사색하는 것이 율곡의 일과였다. 율곡에게 독서는 인간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하는 준거였다.
여섯째, 조선 서적문화와 관련하여 아쉬운 것은 임진왜란 기간 경복궁은 불타고 고려로부터 전해온 전적과 조선 건국 후 200여 년 동안 생산된 방대한 문서가 재가 됐고, 전국 지방 관아에서 축적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목판들도 재가 됐다는 점이다.
<이암일기>는 조선 전기 사람들의 생활사 복구 자료로 중요하다. 유희춘의 장서 축적은 목판을 소장한 교서관에 인쇄에 필요한 비용과 종이를 대고 목판 인쇄본을 받아 보관한 것과 지방의 감사나 지방관에게 부탁하여 인쇄한 것이다. 선물 받은 책, 물물교환, 매매, 사신단을 통해 수입, 대가를 지급한 필사 의뢰 등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3,500 책 이상 소장하였다. 전쟁과 세월이 지나 그의 축적은 오유(烏有 : reverting to nothing 흔적 없이 이전 상태로 돌아간다) 되었다.
<지봉유설>과 <성호사설>에 대한 평가에서 오늘날 독서가들이 가야 할 길을 본다. <이탁오 평전>을 읽은 것이 조선 후기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넓게 읽어야 겹치는 부분이 생기는 거다. “교과서는 인간의 지식을 제한하는 감옥이다.”라는 저자의 격한 표현은 교과서는 지식 일부로 평생 공부하여야 하는 것으로 바꾸어 수용한다. 신채호가 남과 북에서 인정받듯이 어떤 이데올로기든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해 힘쓴 사람들은 높게 평가하고, 일본에 빌붙어 호가호위한 이들도 그에 맞는 평가를 해야만 한 단계 도약이 쉬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책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21세기에 어울리기도 하고 빗나가 있기도 하다. 아직도 펜의 힘이 칼보다 강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고, 카카오가 브런치스토리 플랫폼을 깔아준 것은 추론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힘 빠진 신문과 텔레비전, 인터넷 기반의 유튜브가 책의 자리를 빼앗아가고 있으니 추론이 빗나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