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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충덕 Sep 12. 2023

유라시아 견문 3

한 권의 책에서 특정한 내용을 뽑아 쓴 주제 서평 03

유라시아 견문 Ⅰ을 사서 읽는다면, Ⅱ,Ⅲ은 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 본격화된 제국주의 침탈의 시대가 화산이 분출하듯 1차 세계 대전으로 폭발했다가 꺼져버렸다.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유럽의 힘은 대서양을 건넜고, 태평양도 건널 것이라고 했다. 서세동점에 무릎을 꿇고 식민지를 경험한 아시아 여러 지역은 20세기 독립 이후와 다른 21세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저자의 관점은 서유럽과 미국이 중심인 서구 세계가 동양 세계를 침탈했던 20세기는 비정상이었다. 21세기는 중국과 러시아, 아랍, 유럽이 유라시아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정상이라 본다. 구대륙의 문명의 주요 요소인 유학, 힌두, 이슬람, 그리스 정교 세력이 커진다고 알린다. 이를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관점에서 관찰한다. 저자의 비정상의 정상화를 따라가보고,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사실, 행간에서 읽은 것들을 열거한다.


   책에서 서술된 서구는 서양 일부분인 유럽 기독교 국가로 제한하고, 대항해 시대, 신대륙의 발견은 이베리아의 확산, 중세의 확대라고 보고 있다.

   서구의 팽창은 내재적 발전이 아니라 동서 문물 교류, 융복합과 통섭이 낳은 결과다. 이는 황태연의 패치워크 문명이론과 같은 해석으로 공감한다. 서구는 17~18세기에 기독교 없이도 문명국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했다. 근거로 사서삼경을 알게 된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 등 계몽철학자의 사상에는 중국의 사상을 담거나 변용하였다. 예로, 칸트가 선악과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진리를 따지는 발상의 전환은 <중용>을 수용한 것으로 판단한다. <대학>이 처음 번역된 것은 1592년이다. 쿠플레의 저서 <중국의 철학자, 공자>는 17, 18세기 유럽 지식인의 필독서였다. 특히 <맹자>는 혁명을 설파한 불온서적이었고, 주권재민을 설파하고, 성선설로 원죄론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인의예지의 존중으로 인권과 민권에 눈을 뜨게 된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관점에서 우선 비정상으로 판단한 사례를 본다.

◦프랑스의 우경화는 자기반성 능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고 안정된 사회는 관용적이나 불안정한 사회에서 도리어 획일화, 동질화가 심해진다고 평가한다.

◦20세기 핵가족화의 결과로 평균화, 획일화되었다. 민주화가 아니다. 민주화된 가족에서 아이들의 경험 세계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 학교도 민주화로 사제 관계가 증발하고 똑같은 인조인간을 양성하는 것도 비정상이다.

◦후세인 제거와 카디피 축출에는 달러 결제가 아닌 유로화, 아프리카 통화인 디나르를 결제수단으로 쓰려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비정상 상태를 지속하려는 몸부림이다.

◦폴란드 사상가 리샤르트 레구트코의 시각에서 EU는 비정상이다. 유럽의회는 야당 없는 의회로 주요 의사 결정은 지배 카르텔에서 한다. 선출되지 않은 사람들이 주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니 과거의 소비에트 연방과 유사하다. 즉 EU는 민주주의와 전혀 거리가 먼 기구다.

◦서구 문명을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은 19세기에 발명한 전통이다. 미국 소프트 파워의 힘으로 서구의 기원으로 그리스가 학문적으로 정립되고 ‘그리스 민주주의’라는 20세기 신화가 널리 퍼져나갔다. 문화 냉전의 소산이자 발명된 전통이다.      


   정상으로 가려는 시도와 사례를 통해 전망해 보면,

첫째, 이란 혁명은 이슬람에 바탕을 둔 현대적인 공화정이 가능하다는 모델을 제시하여 전 지구의 모슬렘 공동체(움마)에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는 미셸 푸코가 지켜본 이란 혁명을 지켜보고 내린 평가다. 이를 통해 정상화로 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둘째, 미국이 소련을 침공해 체제를 전환시킨 게 아니라 지레 무너진 거다. 자연스럽지 못한 인공적인 유토피아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상으로 회복된 사례로 본다. 셋째, 쇠락하는 프랑스어보다는 이슬람 문명의 보편어인 아랍어가 세계어로서의 위상을 다시 누릴 날이 머지않았고 전망한다.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과정이 만족스러울 수만은 없다. 공산당 간부들과 그 체제에 부역했던 이들이 민주화 이후 신흥 지배층으로 이행한 것은 동유럽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해방 후 한국의 정국과 유사하다. 체제는 변했으되 지배층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유라시아 견문 Ⅲ이 전하는 지적 호기심을 채울 재료를 모아 본다.

◦아르헨티나에서 예수회는 십자군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원주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프랑스 인권 선언(1789)이 여성과 노동자, 유색인종을 배제한 미완의 것이다. 반면에 예수회 선교사들이야말로 성서가 가르치는 인류 평등에 바탕을 두어 노예와 원주민을 보호했다.

◦프란체스코 현 교황은 경제학 교과서의 낙수효과는 ‘가짜 이론’ Fake Theory라고 성토한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간의 비극을 양산하는 경제체제의 선진화를 비판한다.

◦2010년 가톨릭교도의 7할이 남반구에 살고, 4할이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다. 가톨릭 세계의 제1 언어는 스페인어다.

◦20세기 후반 구축해 두었던 일국 단위 복지 모델이 EU 통합과 더불어 크게 흔들리는 것은 ‘세계화의 덫’이다. 어떤 체제와 이념과 사상도 영구불변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 또한 성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듯하다.

◦강희제는 라틴어를 배웠고, 공맹의 철학이 한글로도 유통되기 전에 벨기에 예수회 선교사 쿠플레는 <중국의 철학자, 공자>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그 소산으로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 동방정교의 세계관이 응축된 작품이 <죄와 벌>이다. 국가와 사회와 종교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야 한다는 것이 동방정교의 핵심 사상이다. 러시아에서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리스 고전을 원전으로 배운다. 러시아 교양의 양대 축이 정교와 그리스 사상이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은 유라시아 문헌 번역을 전담하는 기구를 만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은 1991년부터 이후부터 태어난 신입생에게 <코란>과 <논어>를 읽으라고 가르친다. 러시아인 가운데 2,000만이 모슬렘이다.

◦카잔은 유라시아의 이슬람화와 튀르크화를 선도하는 전위였다. 그 카잔을 복속시킴으로써 러시아는 유라시아 제국으로 굴기할 수 있었다. 레닌, 트로츠키, 마르크스는 러시아 내 모슬렘에 대해 무지했다.

◦볼셰비키 혁명 당시 시베리아에서 결전이 벌어졌고, 미국은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물자를, 일본은 7만 명의 군사를 출병하여 백군을 지원했다. 소련을 우랄 서쪽으로 봉쇄하고 동쪽에 울란우데나 치타를 수도로 삼아 ‘극동 공화국’을 세우려 했다. 1918년 이르쿠츠크까지 장악했던 일본군이 1925년 최종적으로 물러났으나, 이 실전 경험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관동군의 주축이 된다.

◦저자는 홋카이도 대학에 있는 슬라브-유라시아 연구소, 북극연구소를 참관하고, 1880년, 1881년 메이지 일본이 오스만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에 사절단을 파견했음을 확인하고 자괴감과 열패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메이지 일본이 서구 편향적이지만은 않았고, 이슬람 세계로, 슬라브 세계로, 전방위적이고 전면적인 개화를 추진했다.


    독자가 행간에서 읽은 것들이다.

   19세기 러시아와 오스만의 수차례 전쟁은 그리스 정교도와 모슬렘 간 문명의 충돌이라는 서술은 새뮤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보인 관점과 같다.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것은 미국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모슬렘의 각성을 두려워했던 것이라는 판단은 냉전식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 수 있다.      ‘~의 파리’라는 서술은 비서구의 서구화, 적폐의 소산이라고 본다. 오리엔탈리즘에 물든 비서구인의 자기 비하이자, 호미 바바의 해석으로 ‘흉내내기’다.

   저자가 가진 시간과 공간에 관한 관점은 “시간은 앞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아래로 쌓여 공간을 이룬다. 그렇게 축적된 시공간의 지층이 바로 역사다”라고 본다. 시간과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한다.

   유고슬라비아의 자화상을 7(국경)-6(공화국)-5(민족)-4(언어)-3(종교)-2(키릴과 로마문자)-1(하나의 국가)로 그린 것은 복잡함을 어떻게 단순화하는가를 보여주는 사고방식이자 글쓰기다.

   만사를 토론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회합이 없다. 동등하게 토론할 실력과 토의할 만큼 공부가 되어 있지 않으면 중구난방과 횡설수설이 오가다 오리무중으로 빠져 허무하게 끝난다는 저자의 생각은 독단적인 사고라 평가하지 말라는 관찰과 체험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다.


   장쾌하다. 저자의 호연지기가 독자 가슴에 불을 댕기고 바람을 넣는다. 시야를 한반도란 고립된 섬에서 밖으로 돌리려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한다. 글과 사진은 고전이 주지 못하는 생기를 담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조망하는 규모만 큰 게 아니다. 유라시아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미래까지 꿰어본다. 저자의 제안은 배우는 사람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기를(로마 문자 공론장만 읽어서는 진실의 절반도 접근할 수 없다. 키릴문자와 한문, 아랍 문자 공론장을 보태어 관점의 균형을 취해야 한다. 그래야 세력 균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더불어,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지속할 수 있을지, 중국의 굴기는 어느 수준까지 가능할 것인가? 예측해 보자.     


P.S 유라시아 견문 Ⅰ을 사서 읽는다면, Ⅱ,Ⅲ은 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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