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3박 4일 동안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제주를 갔지만 피치 못한 사정으로 하루 일찍 귀가를 하게 되었다. 돌아가는 날이 하필이면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는데, 나는 잠까지 줄여가며 우여곡절 끝에 밤 9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매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눈 뒤 도착한 공항. 탑승시간까지 세 시간가량이 남아있었지만 나는 딱히 둘러볼 곳도, 면세점을 들릴 이유도 없어서 서둘러 짐을 부친 뒤에 수속을 완료했다.
왁자지껄했던 사람들이 수 없이 모여들었다가 사라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내 차례가 다가왔고, 탑승구 쪽에서 오래 기다려서 그런지 나는 꽤 앞 줄에서 무리 없이 탑승을 완료했다.
일찍 발권을 해두었던 덕분에 가장 앞자리에 앉은 나는 친구들에게 이제 이륙한다는 문자를 보냈고, 못내 아쉬운 마음을 삭히려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니 비가 툭툭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리 굵은 비는 아니어서 그냥 무의미하게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비행기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부유감이 온몸에 전해졌다. 도착까지 45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는 말에 나는 자기도 애매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휴가 중 찍었던 사진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감상에 잠겼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정말 잠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내에서는 이제 곧 착륙을 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창밖을 보자 낚싯배인지 아닌지 모를 수십 척의 배들이 바둑판 모양으로 빛을 내고 있었고, 얼마 뒤 짙게 깔린 구름 사이로 얼핏 부산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는 이전과 다를 게 없는 상황.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가까워져야 할 땅은 점점 멀어졌고, 이륙할 때와 같은 부유감이 다시 한번 내 몸을 스치더니 비행기가 기울어져 날기 시작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회전하면서 상승하고, 다시 회전하면서 하강하는 것을 반복하기를 30분째. 조금씩 속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건너편에 앉아있던 노부부가 구토 증세를 보인다며 다급히 승무원을 불렀다.
시간이 길어지자 좌석 주변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승무원은 계속 착륙을 시도하고 있으며 만약에 착륙이 안 되는 경우 회항을 할 수도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도 계속 제자리를 돌고 있을 뿐인 비행기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으며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문의를 하는 승객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물론 나도 계속해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부산의 불빛을 몇 번이고 보다 보니 약간은 희망고문을 당하는 듯 지쳐갔다.
무언가 교신이 오고 간 듯, 무전기의 치지직 하는 소리가 내 머리 위에서 들렸다. 승무원도 무언가를 직감한 듯, 출입구 쪽에 있는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고 몇 초 뒤 수화기를 들고 좌석 쪽을 바라보았다.
"현재 저희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인하여,
부산이 아닌 인천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기에 멍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안전이 제일이었기에, 항공사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을 하며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방송 직후 주변의 웅성거림은 더 커졌다. 다들 그렇듯, 인천에서 내린 이후 어떻게 다시 부산으로 올 수 있는지와 지금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웅성거림을 상쇄하려는 것처럼 비행기 엔진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기체가 수평에 이르자 비행기는 어느 방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인천을 향하는 것이라면 직선 경로에 있는 도시들이 드문드문 보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창밖은 구름으로 자욱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은 전국적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비행기가 구름 위로 운항을 한다고 생각을 하기 쉽지만, 그날은 비구름이 위아래로 짙게 형성되어서인지 비행기는 솜사탕 속을 유영하듯 구름 속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무심하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구름 속을 통과하는 기체는 당연하게도 심하게 흔들렸다. 번개도 자주 쳐서인지 창밖은 가끔씩 번쩍였고, 비행기의 엔진 또한 굉음을 내었다. 승무원은 5분에 한 번씩 비행기가 흔들리니 안전벨트를 잘 매어 달라는 방송을 했지만 무언가 불안한 기운이 공간을 서서히 채워갔다. 그러다 무언가 비행기가 크게 요동칠 정도로 "쿵!" 하는 진동과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내가 있던 좌석 뒤편에서 "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흔들거리는 비행기 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자 무언가 재난 영화를 보는 듯했다. 승객들도 그 소리를 기점으로 불안함이 터져 나왔던 것인지 무언가 분노가 섞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치 아수라장이 될 수도 있을법한 상황. 하지만 승무원들은 능숙하게 행동했고, 빠르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승객들을 진정시켰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떨치고자 애써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애석하게도 내가 바라본 풍경 또한 그리 평온하지 않았다. 창밖에는 비행기 불빛에 반사된 구름이 주황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이는 마치 이글거리는 불구덩이 속을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뒤 구름이 걷히고, 지상에서는 수많은 불빛들이 보였다. 그리곤 기내에서도 이제 인천 공항에 착륙을 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비행기의 바퀴가 땅에 닿을 때의 느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이때는 이 느낌이 참 반갑게 느껴졌다.
비행기의 출입구가 열리고 항공사의 직원분이 고개를 빼꼼히 내어 간단한 안내를 시작했다. 올바른 목적지에 착륙하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과 부산으로 가는 전세버스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그것을 타면 된다는 말을 했다. 사람들도 부산에 도착하지 못했다는 분노보다 안전하게 착륙했다는 안도감이 더 컸던 탓인지, 이후에는 볼멘소리 없이 차례차례 하차를 했다.
시간은 밤 12시. 하얀 셔츠를 입은 지상 승무원을 따라 불이 꺼진 공간을 하염없이 걷다 보니 짐을 찾는 곳이 나왔다. 승무원은 이곳에서 짐을 찾은 뒤에 복도 끝에 보이는 문으로 나오면 버스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고자 짐이 나오는 곳 가장 가까운 곳에 섰는데, 화장실을 다녀온 승객들도 하나둘 내 뒤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전원이 켜지고, 마치 피난민들처럼 핼쑥해진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짐을 찾아서 이동했다. 얼마뒤 나의 짐도 벨트를 따라 나와서 나는 훌쩍 잡아챈 이후에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무언가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후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는 생각으로 캐리어를 바라보니, 비행기에 가해진 충격 때문인지 캐리어의 이동 손잡이가 박살이 나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대형 캐리어를 두 손으로 힘껏 들고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로비로 향했다.
출국장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안전요원들이 승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걸음을 더 가자 사원증을 맨 항공사 직원들이 버스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도로를 따라 쭉 이어져 서 있는 몇 대의 버스들. 각각의 버스에는 각기 다른 부산의 목적지가 쓰여 있었는데, 나는 어느 곳으로 가든 비슷해서 부산/김해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해당 버스는 의자들 사이의 공간이 좁아서 어깨가 닿을 수밖에 없었는데, 다들 새벽이라 그런지 하나둘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보며 정작 5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부산에 도착할 때 즈음 되자 몸과 마음은 피폐해진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집에 도착하여 자고 일어났을 시간인데,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푸념도 조금씩 생겨났다.
새벽 5시의 공항은 참 적막했다. 자동차와 사람으로 북적거렸어야 할 게이트들은 황무지처럼 공허했고, 어둠을 밝히는 몇 개의 가로등만이 이곳이 공항임을 알려주었다.
나는 비에 맞은 생쥐꼴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택시 기사님은 "오늘 비행기가 이륙을 안 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라고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나는 간략하게 기상이 악화되어서 비행기가 운행을 못하는 상황이며, 나 또한 인천에 내려서 이리로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택시 기사님은 나에게 고생 많았다는 말을 남기시고서는 조용히 목적지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던지듯 캐리어를 두고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한 뒤 곧장 침대로 몸을 날렸다. 너무나도 지치고 힘든 일정이었기에 얼른 쉬고 싶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천장을 바라보자 창밖에는 나의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