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가을의 끝자락, 낙엽이 흩날리고 있는 중학교 운동장은 묘한 활기로 가득했다. 아이들은 파란 매트리스와 높이뛰기 봉 앞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도움닫기를 해서 눈앞에 있는 바를 넘으면 돼.”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저마다 힘차게 달려 나갔지만, 모두 하나같이 바를 치거나 제대로 넘지 못하고 매트에 뒹굴었다.
“저건 운동 신경 좋은 애들만 되는 거야.”
아이들이 대수롭지 않은 농담을 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그때 미나가 출발선에 섰다. 미나는 자신의 눈높이에서 평행하게 놓여있는 막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던 미나는 조심스레 달려 나갔다. 점프를 하는 순간 곧바로 몸을 틀었지만 자세는 엉성했고, 바에 엉덩이가 스치며 그녀의 몸은 매트리스를 향해 떨어졌다.
아이들은 그 모습에 킥킥 웃기도 하고, 흥미를 잃은 듯 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미나의 표정에는 실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닌, 놀라움과 즐거움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매트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햇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선생님! 한 번만 더 해볼게요.”
미나는 매트에서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그리고 다시 출발선을 향해 돌아갔다.
“오, 진짜? 미나 열정적인데?”
선생님은 미나의 움직임을 힐끗 보며 웃었다. 주변에서 약간의 야유가 들렸지만 미나의 눈은 오직 플라스틱 바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 번째 시도에서 미나는 이전보다 빠르게 달려갔지만 또 한 번 그녀의 몸은 바와 함께 매트리스로 떨어졌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미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손을 꽉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체육수업이 끝난 뒤 친구들이 교실로 돌아가며 장난스레 떠들 때, 미나는 뒤에 남아 세워진 바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금 전의 모습을 재현하듯, 제자리에서 살짝 점프를 했다. 착지를 한 두 발의 모양새는 어색했지만, 발자국이 남을 만큼 지면을 단단하게 밟고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미나는 도움닫기를 하듯, 잰걸음과 큰 걸음을 섞어가며 걸음을 걸었다. 그러다 마을에 가까워지자 미나는 괜히 운동화를 끌며 걸었다. 담 너머 창문으로 불이 켜져 있었고, 그 불빛 사이로 익숙한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미나는 길게 숨을 내쉰 후 문을 열었다. 그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작은 비밀이 서서히 자라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거실에 놓인 휠체어였다.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었던 탓에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휠체어는,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며 집 안의 공기를 조용히 누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미나는 그 휠체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인 정호의 지난날을 상징한다는 것을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부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TV에서 육상 경기가 나오면 정호는 눈을 돌렸고, 유명 선수들의 훈련 장면이 나올 때면 인상을 찌푸리며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바꾸곤 했다.
미나에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정호는 한때 유망한 육상 선수였다. 국가대표 후보로 오르내리던 시절도 있었고, 주변에서는 그가 곧 큰 기록일 낼 것이라며 기대했다. 하지만 어느 날, 훈련 중 발을 디딘 스파이크 밑에 작게 패인 홈 하나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도약 후 착지하는 순간 몸의 균형이 무너졌고, 그대로 그의 허리와 무릎에 충격이 가해졌다. 병원에서는 예전과 같은 몸으로 완전하게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정호는 그 후로 목발과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고, 운동선수라는 정체성은 잿빛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미나는 아버지가 그 사고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호는 그저 “운동을 하다가 크게 다쳤다.”라는 말로 넘어갈 뿐 자세한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나 또한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집 안에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미나의 손이 무언가의 경계를 넘으려는 듯,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저녁 식탁 위에 놓인 국에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을 때, 미나는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정호는 TV 뉴스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미나의 굳은 표정을 보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아빠!”
미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나 있잖아… 높이뛰기해보고 싶어.”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미나의 말에 정호는 짧게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잠시 뒤,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돼.”
정호의 말투는 단호했지만, 말끝이 약간 흔들렸다. 미나는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버지가 떨리는 숨을 참고 있는 것을 보며 말을 삼켰다.
“그 운동은 위험해. 아빠는… 알고 있어.”
정호는 끝내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미나의 얼굴이 상기되며 동시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도 조심할게. 진짜 해보고 싶은데…”
미나의 말에 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미나야, 부탁이다. 그냥 공부나 다른 취미를 가지면 안 되겠니?”
정호의 말은 애원에 가까웠다.
미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결국 미나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방 문을 닫는 순간, 정호의 깊은 한숨이 뒤에서 들려왔다. 식탁 위에는 식지 않은 국만 남아 있었다.
며칠 동안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서로를 피했다. 정호는 미나가 아침에 학교를 갈 때 “조심히 다녀와”라고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작고 가늘었다. 미나는 그 말에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집안의 공기는 마치 비가 오기 전의 그것처럼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호는 미나가 식탁 맞은편에 앉으면, 무언가 입을 뻐끔거렸지만 소리는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미나 역시 입을 꾹 다물고는 밥그릇만을 내려다보았다.
미나는 학교에서도 이전처럼 활발하게 웃지 않았다. 친구들이 장난을 치며 웃을 때도 무언가 풀이 죽은 모습이었고, 쉬는 시간마다 남몰래 복도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저녁, 정호가 과일을 손질하는 모습을 보던 미나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거실 이곳저곳에는 정호가 매일 닦는 미나의 여러 액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미나는 또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후 머리까지 이불을 덮고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정호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문 사이에는 서로를 걱정하는 존재들의 잔잔한 단절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미나는 혼자서 운동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에 미나는 슬그머니 뒤에 남았다. 뉘엿뉘엿 어스름이 찾아와 고요해진 운동장에는, 낡은 매트와 흠집이 조금 난 바, 그리고 미나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신발끈을 단단히 묶어 스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교사가 알려준 기본이 전부였지만, 미나는 몸으로 감각을 찾아가는 것에 집중했다.
“아빠 몰래 이러는 게 맞을까?”
매트에 누운 채로 미나가 말했다. 도움닫기를 하고 매트에 몸이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발은 한층 더 경쾌해졌지만, 얼굴에서는 그만큼 짙은 그림자가 번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 앞에서 신발 끝을 몇 번 쓸어내리듯 차던 미나는, 문을 잡은 손을 한참 동안 놓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잠시 멈춰 선 미나는 가방끈을 고쳐 매고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철문을 울리는 소리는 그날따라 더욱 무거웠다.
미나는 다음날도 어김없이 운동장에 홀로 남았다. 해가 기울며 운동장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높이뛰기 기구 옆으로는 휑한 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미나는 발목을 돌리고 짧게 호흡을 맞춘 후, 달려가 바를 넘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매트 모서리에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몸을 추스르는 순간, 선생님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혼자 연습했지? 스텝은 아직 어색하지만 회전 감각은 좋아. 타고나는 친구들이 이런 식으로 동작을 잡더라.”
선생님의 말에 미나의 얼굴에는 벅차오른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은 미나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운동하는 걸 부모님께서 반대하시니?”
미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은 그 모습에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나야,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길이라면, 언젠가는 제대로 말씀드려. 그때는 분명 이해해 주실 거야.”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위로에 미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생님이 돌아간 이후에도 미나는 한참 동안 매트리스에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의 눈에는 결의가 새겨져 있었다. 가방을 챙겨 교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미나의 발걸음을 달빛이 옅게 비추고 있었다.
그날 밤, 정호는 신발들을 정리하다 우연히, 미나의 신발이 지나치게 해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미나의 신발 밑창은 평평하게 닳아 파여있었고, 발볼 쪽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렇게까지 닳은 신발은 단순히 체육 수업을 들어서는 나올 수 없는 흔적이었다. 그는 손에 신발을 들고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혹시… 미나가 아직도 높이뛰기를…?”
정호는 신발을 내려놓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다친 다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정호는 한숨과 같은 말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밤이 더 깊어질 때까지 미나의 낡은 신발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침묵이 지속되던 어느 날 저녁, 식탁 앞에서 미나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맞은편에 앉은 정호가 신문을 넘기며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있었지만, 그 눈 아래에는 깊은 피로가 깔려 있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빠… 나, 다시 말하고 싶어.”
정호는 미나의 입술이 떨리는 것을 보고 신중하게 신문을 내려놓았다.
“나 진짜 높이뛰기하고 싶어.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뛰는 순간이 너무 좋아.”
미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단했다.
“아빠 몰래 연습하기도 했어. 그건 미안해. 근데… 나는 계속하고 싶어.”
미나의 말에 정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말없이 따를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엔 서운함과 죄책감, 걱정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
“미나야…”
정호는 천천히 말을 했다.
“아빠가 반대한 건 네가 미워서가 아니야. 아빠가 운동 때문에 어떻게 됐는지 너도 알잖아.”
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난 할래. 내가 다칠까 봐 걱정하는 건 알아. 나도 겁나긴 하지만, 그래도 뛰고 싶어.”
미나의 말이 끝나자 정호는 머리를 숙였다. 식탁 밑에 놓인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정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미나를 바라보았다.
“… 그래, 알겠다. 대신 약속 하나 해라.”
미나는 숨을 삼키며 정호를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않기. 그리고 아프면 숨기지 않기. 그 두 가지는 꼭 지켜라.”
미나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활짝 웃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정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두터운 벽이, 천천히 금이 가며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정호는 허락을 하고 난 뒤, 며칠간 깊이 고민했다.
“무엇부터 알려줘야 하지… 내가 정말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정호는 깊은 한숨을 여러 번 내뱉으며 자신의 두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래된 서랍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그 빛바랜 물건의 표면엔 ‘훈련 일지’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운동장에 함께 나갔을 때, 정호는 휠체어 너머로 미나의 자세를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스텝을 밟을 때 왼발이 너무 먼저 나가. 리듬이 흐트러져.”
미나는 아버지의 지적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제를 단번에 캐치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운동을 가르치는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정호는 직접 뛰어 보여줄 수 없었지만, 손으로 공중에서 궤적을 그리며 몸의 각도를 설명했다.
“바에 가까워질수록 몸을 작게 말아. 발을 디디는 순간, 힘을 주지 말고 그대로 넘긴다는 느낌으로.”
미나는 정호의 말을 하나하나 새기듯, 고개를 끄덕였다.
첫 시도는 실패를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시도가 이어지며 미나는 점점 더 부드럽게 바를 넘었다. 마침내 높은 바를 완벽하게 넘었을 때, 정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비치는 표정이었다. 그는 조용히 박수를 쳤다.
“좋다… 아주 좋아.”
그날 미나와 정호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오래도록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응원하며, 같은 방향을 향해 뛰는 동료가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운동장에는 수많은 신입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보통 신입생들은 교복에 낯설어하며 조심스레 움직이지만, 체육 특기생들은 이미 운동장 일부를 점령한 듯,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서 있었다. 미나 또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학생들 사이에서 나란히 선채로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정호는 관람석에서 그런 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는 다른 학부모들 사이에서 한층 더 눈에 띄었지만, 그의 시선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저 오늘 하루만큼은 딸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는 한 명의 부모일 뿐이었다.
입학식이 끝나자 새 운동부원들에게 첫 안내가 이루어졌다. 운동장 한쪽에서 선글라스를 낀 감독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위압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선 이상, 너희는 그냥 학생이 아니다. 너희들은 기록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알았나?”
미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동시에 입꼬리가 올라가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훈련 시설을 둘러보는 시간, 미나의 시선은 유독 높이뛰기 매트와 바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중학교에 있던 낡은 장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만큼 크고 튼튼한 매트와 높이가 정교하게 조절되는 거치대를 보면서 미나는 자신도 모르게 “와…”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정호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딸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자, 그의 얼굴에서는 다시 한번 복잡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미나는 정호를 바라보았다.
“아빠, 나… 진짜 잘하고 싶어.”
조용히 꺼낸 미나의 말에 정호는 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미나야, 아빠가 네 꿈을 언제까지고 응원하며 지켜볼게.”
아빠의 응원에 미나의 얼굴에는 활짝 미소가 번졌다. 이어서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미나와 정호의 사이에는 따뜻한 햇살이 가득 머물렀다.
이후 미나의 일상은 훈련으로 가득 채워졌다. 새벽과 점심, 하교 후까지 이어지는 일정 속에서 그녀의 몸은 고단했지만 동작은 점점 안정돼 갔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미나의 기록은 점차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불안정했던 발구름이 안정되었고, 공중에서의 회전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저 아이는 전체적인 감각이 좋네.”
감독은 그런 미나의 노력을 유심히 지켜보며, 학생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조용히 말을 했다.
미나의 꾸준한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작은 지역 대회에서 입상을 하기 시작하면서 미나의 이름이 운동부 게시판에 종종 올라왔고, 그 모습에 동료들도 자연스럽게 미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정호는 가능한 한 미나의 모든 경기를 찾아갔다. 다리의 통증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미나의 도약을 보는 순간만큼은 그의 표정에서 불편함이 사라졌다.
정호는 딸이 날아올라 바를 멋지게 넘어갈 때면, 마치 자신이 성공을 한 듯 주먹을 치켜들었다. 미나 역시 경기 중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국가대표 선발전 일정이 발표된 뒤, 운동부 전체가 보다 더 혹독한 훈련 모드로 돌입했다. 감독은 미나에게 개인 집중 훈련을 배정했다.
“너도 이제 출전 가능한 나이다. 준비 잘하자.”
감독님의 말에 미나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아침 훈련에서부터 도약 방법을 반복하고, 밤에는 국가대표들의 경기 영상을 보며 동작을 연구했다. 특히 잘 되지 않는, 뛰기 직전에 리듬을 잡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반복했다.
“너는 재능은 있지만 때때로 서두른다. 바를 넘기 전에 이미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하면 리듬이 깨지기 마련이야.”
감독님의 지적에 미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달려가고, 멈추고, 넘고, 실패하며 리듬을 찾아갔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미나는 멈추지 않았다. 스텝이 흔들리면 다시 처음부터 뛰었고, 넘어지면 일어나 동작을 고쳤다. 감독은 그 과정을 지켜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의욕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믿고 한 걸음씩 성장하는 선수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 저녁, 정호는 식사 중 젓가락을 놓치고 잠시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괜찮다며 웃었지만, 미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며칠째 이어진 작은 이상 신호들이 그녀의 눈빛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연습 경기가 있기 하루 전날, 정호는 흐트러진 호흡을 억지로 붙잡으며 미나를 불렀다.
“이번 경기에는 아빠가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매 경기마다 빠지지 않고 관중석 한편에서 미나의 이름을 불러주던 정호가 참석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자 미나는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찌 보면 그 말이 정말로 몸이 좋지 않다는 신호였기에 미나의 얼굴에는 그윽한 슬픔이 어렸다.
미나는 정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갔지만, 닫힌 문 너머에선 다시금 정호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는 어느 저녁, 훈련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미나는 집이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느꼈다. 식탁에는 차가운 밥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아버지의 휴대폰만 덩그러니 소파에 놓여있었다. 순간 가슴이 빠르게 뛰며 이리저리 아빠의 흔적을 찾던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입니다. 박정호 씨 따님 되시나요?”
정호가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로 실려왔다는 말에 미나는 운동 가방을 내팽개치고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는 정호가 여러 기계에 연결된 채 누워 있었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희미한 숨소리만 들렸다.
“근기능 저하와 과도한 스트레스가 겹친 겁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의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미나는 침대 옆에서 정호의 손을 잡았다. 정호는 힘겹게 눈을 떴다.
“미나야… 미안하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아빠 때문에 괜히 훈련에 방해가 됐네.”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혼자 참았어… 왜.”
미나는 흐느끼며 정호의 손을 더 강하게 잡았다. 시간은 밤을 향해 나아가고, 병실의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다.
정호의 입원 이후, 미나의 훈련은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출발선에 서면 어딘가 먼 하늘을 쳐다보기 일쑤였고, 두 발도 사뭇 느려졌다. 그 때문인지 몸의 리듬이 깨지면서 점프 동작 또한 무너졌고,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넘던 높이도 계속해서 실패했다. 한 번은 착지를 하다가 매트 모서리에 부딪혀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감독은 처음엔 컨디션 난조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나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나는 훈련 중 거의 웃지 않았고, 주변 동료와의 대화도 줄어들었다. 강한 의지를 보였던 아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동료들도 조심스레 다가왔지만, 미나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했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미나의 태도에 감독의 눈빛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미나는 낮은 높이의 바를 치고 매트에 떨어지자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일어서라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음에도 미나는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아빠의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미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매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출발선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발은 트랙을 디디고 서 있었지만, 두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훈련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탓에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던 미나에게 결국 결정적인 날이 찾아왔다. 비가 내린 뒤 축축해진 운동장에서 미나는 기본적인 스텝조차 제대로 밟지 못했다. 달리다 호흡이 무너지고 발을 잘못 디뎌 바를 치는 실수가 반복되자 감독은 결국 훈련을 중단시켰다.
“야! 박미나!”
감독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울렸다. 미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멈춰 섰다.
“도대체 정신이 어디 가 있는 거야? 이 상태로 무슨 선발전을 치르겠다는 거야?”
감독은 미나의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미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감독은 미나의 눈빛이 불안정한 것을 보며 질문했다.
“요즘 왜 이러는지 말해봐. 경기를 일주일 앞둔 선수가 이러면 안 돼.”
미나는 우물쭈물하며 망설였다. 그러다 순간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 아빠가 병원에 있어요.”
그 말과 동시에 미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독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 냉정했던 눈빛이 흐트러지며 혼란이 스쳤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미나를 쳐다보았다.
“… 왜 그걸 지금 말했어?”
“말씀드리면 제가 흔들리는 줄 아실까 봐… 그래서 선발전에 못 나가게 하실까 봐…”
감독은 미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가까스로 삼키는 소녀의 어깨가 작아 보였다. 감독은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비에 젖은 운동장만큼 축축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다음 날, 감독은 미나를 별도로 불렀다. 운동장 한쪽 벤치에 앉아 있는 감독의 얼굴에는 전날의 날카로움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어딘가 깊게 고민한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미나야 운동은 결국 마음이다. 마음이 한눈팔면, 스텝이 제일 먼저 틀어져.”
그는 담담하지만 부드럽게 말했다. 미나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를 보고 와라. 지금 너한테는 그게 먼저다.”
미나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 정말 다녀와도 되나요? 선발전이 코앞인데…”
“괜찮아. 네가 해온 노력은 하루 이틀 쉰다고 무너지지 않아. 그러니 다녀와. 그게 네 기록에도 도움이 될 거다.”
감독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감독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미나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뚜렷하게 퍼져나갔다.
이후 미나는 짐을 챙겨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운동장에는 새벽 공기가 차갑게 감돌았지만, 미나의 발걸음은 오랜만에 가벼워지고 있었다.
감독의 허락을 받은 미나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왔다. 병원 복도는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 울리는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호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미나를 보자마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미나야? 운동은…?”
미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버지의 옆으로 다가갔다. 정호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창백했고, 손등엔 여러 바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빠, 괜찮아?”
미나의 말에 정호는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쉽게 올라가지 않는지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에 대해 가볍게 얘기를 나눈 후, 정호는 살며시 미나의 손을 잡았다.
“미나야, 네가 뛰는 모습을 보면 아빠는… 그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정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나갔다.
“아빠는 네 꿈을 막고 싶어서 반대한 게 아니야. 그냥 네가 다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
미나는 그 말에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조용히 아래로 흘렀다. 그 모습에 정호는 미나의 어깨를 가볍게 손으로 두드렸고, 미나는 자신의 손을 꼭 쥐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다음 날, 미나는 이른 아침 운동장에 섰다. 훈련을 시작하자 몸은 오랜만에 가볍게 반응했다. 스텝과 회전이 다시 안정됐다. 감독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까지 흔들리던 미나의 눈빛은 다시금 빛나고 있었다.
미나는 출발선 앞에서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그녀는 정면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그대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몸이 힘차게 날아올라 매트에 부드럽게 떨어지는 순간, 미나는 개운해진 얼굴로 씩 웃었다.
“미나야, 표정 좋아졌다. 오늘 왜 이렇게 잘 돼?”
동료들도 그녀의 변화를 알아채고 다가와 격려했다.
“그냥… 마음이 좀 정리된 것 같아.”
미나는 가볍게 답했다.
훈련이 끝난 뒤, 미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는, 내가 뛰어오를 차례야.”
미나의 두 눈에는 이제 두려움보다 굳센 결의가 깃들고 있었다.
국가대표 선발전 당일 아침, 경기장은 수많은 응원소리로 가득했다. 선수들의 이름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고, 관중석에서는 부모와 친구들이 응원의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미나의 심장은 옆사람에게 들릴 듯, 크게 두근거렸다.
몸을 풀며 운동장을 천천히 걷자, 옆에서는 다른 선수들이 저마다 강한 눈빛으로 바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위축될 만도 했지만, 미나는 웃으며 어깨를 돌렸다.
“미나야, 긴장되겠지만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돼. 결국 뛰는 건 너니까.”
감독의 마지막 조언에 미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경기장은 점점 더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심사위원들의 준비가 끝나자 마침내 선수들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박미나 선수, 준비해 주세요.”
그 말이 들리는 순간, 미나는 양손으로 가볍게 자신의 뺨을 때렸다. 이후 그녀는 통통 튀듯 발을 구르며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공포를 밀어냈다.
미나는 천천히 출발선 쪽으로 걸어가며 바를 올려도 보았다. 가로로 놓인 바는 그녀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미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준비자세를 취했다.
첫 시도는 비교적 낮은 높이였다. 평소라면 쉽게 넘을 수 있는 기록이었지만, 경기장의 공기가 미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주변에서는 감독의 시선이 느껴졌고, 관중석의 웅성거림도 점점 멀어졌다.
“평소처럼. 그냥… 연습하듯이.”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신호가 떨어지자 미나는 뛰어올랐다. 첫 스텝은 좋았지만 바를 넘기 직전 그녀의 몸이 순간 굳었다. 공중에서 몸의 회전이 자연스럽지 못했고, 결국 엉덩이가 바를 스쳤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등으로 전해졌고, 바는 흔들리다 끝내 떨어졌다.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미나는 매트에 누워 그대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이런 실수를…”
미나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일어나자, 감독이 다가왔다.
“괜찮아. 첫 시도에는 긴장이 들어가서 그럴 수 있어. 다음은 네 템포대로 해.”
감독은 화를 내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미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출발선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시도는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이번에는 넘어야 해.”
미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출발하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생각이 많았던 탓인지 미나는 한 박자 늦게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딛는 보폭은 너무 길었고, 이어지는 공중 동작들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바에 걸리고 말았다.
바가 떨어지는 소리가 첫 번째보다 더 크게 울렸다. 미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자신도 놀랄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매트를 빠져나오자 주변에서는 격려의 말을 했지만 미나는 들리지 않는 듯, 멍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세 번째 시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야… 놓치면 안 돼.”
미나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번 시도에도 실패를 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미나는 다시금 세팅되고 있는 바를 쳐다보았다. 그 높이가 실제보다 더 높아 보였다. 주변의 소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미나에게는 오직 자신의 심장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하지만 그 순간, 관중석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작은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미나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췄다.
감독도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곤 조용히 미나를 바라보며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미나야… 너, 이제 괜찮을 거다.”
감독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확신이 담겨있었다.
미나는 그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아빠…?”
확신할 수 없었지만, 미나는 순간적으로 바를 보던 시선을 멈추고 천천히 관중석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관중석 한가운데에는 휠체어에 앉은 정호가 있었다. 두 팔을 천천히 들어 자신을 향해 크게 흔들고 있는 그 형체는, 희미하게 보였지만 분명 아버지였다.
“미나야!”
정호의 표정은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밀려 나오는 목소리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힘껏 달려라. 넌 할 수 있다!”
이어지는 정호의 응원에 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눈물이 살짝 맺힌 눈으로 정호를 보며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감독이 그런 미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가라. 아버지께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려.”
감독의 말에 미나는 다시 출발선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표정에는 무언가 굳은 결심이 솟구치고 있었다.
심사위원의 신호가 떨어지자, 미나는 아주 길게 호흡했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있었지만, 그 바람조차 그녀를 밀어주는 듯했다. 미나의 첫 발이 땅을 정확히 밟았다. 이어지는 도움닫기에서도 흔들림은 없었고, 리듬마저 완벽했다. 그렇게 미나의 몸이 속도를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완벽한 허리 궤적이 그려지며 회전이 부드러워졌고, 공중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가볍게 매트 위로 떨어졌고, 바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관중석에서는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단순한 환호가 아닌, 한 소녀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약한 순간을 축하하는 울림이었다.
미나는 매트 위에 누운 채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곤 관중석을 바라봤다.
정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고 있었다. 미나는 그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다.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 선수들은 모두 시상대 앞에 모여 있었다. 미나는 손을 가볍게 감싸 쥐고 숨을 고르며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아직도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 떨림은 불안이 아니라 기쁨과 여운이었다.
“여자 높이뛰기… 우승, 박미나 선수!”
그 순간, 경기장이 다시 한번 크게 뒤흔들렸다. 미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고, 눈시울이 뜨겁게 차올랐다. 시상대 위로 올라간 그녀의 목에 금메달이 걸리자 함성과 박수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미나가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들자, 모든 관중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정호 역시 두 팔을 크게 휘둘러 박수를 치고 있었다.
주변 선수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수많은 격려와 축하 속에, 감독도 다가와 “잘했다.”라는 말을 미나에게 건넸다. 시상식이 끝나고 내려오는 순간, 미나는 이미 아버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미나가 관중석 계단을 뛰어올라갈 때, 정호는 떨리는 손으로 휠체어를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관람객들이 길을 터주자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맞닿았다. 미나의 목에는 금메달이 빛나고 있었고, 정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아빠!”
미나는 그대로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정호는 두 팔을 힘겹게 들어 딸을 끌어안았다. 그 포옹에는 지나쳐온 수많은 시간과 서로에 대한 따뜻함이 묻어났다.
“미나야… 정말 잘했다. 넌, 정말… 대단한 선수야.”
정호는 딸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와줘서… 나 진짜 힘이 났어.”
미나는 꾹꾹 참던 울음을 쏟아내었다. 정호는 고개를 저으며 미나의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아니야. 넌 혼자서도 훌륭했어. 아빠는 그냥… 우리 미나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 장면을 지켜보며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미나는 아버지의 휠체어 옆에 앉아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은 반짝이는 금메달보다 더 빛이 나는 순간이었다.
그날 미나의 마음속에 깊게 새겨진 건 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환호성이 아닌, 소소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아버지와 함께한 도약. 그리고 이제, 그녀는 더 높이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