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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Mar 15. 2021

직접 본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에세이]


 나는 시간을 내어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나, 아픈 이야기들을 털어내고 싶어서 나를 불러주는 사람들을 항상 반기는 편이다. 보통 그렇게 꺼내놓는 이야기에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들이나 불필요한 오해, 그리고 스스로의 힘듦을 마음 편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답답함 등이 많이 섞여있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화자 스스로가 느낀 감정들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과 위로를 전하지만, 때때로 이야기들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인 폄하나 그 사람의 인격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말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 섣불리 결론을 짓는다던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결론을 미리 내지 않는다. 내가 이와 같은 습관을 가지게 된 이유는 어릴 적 나와 친했던 어느 친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아직 같은 반의 친구들의 이름조차 잘 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어떤 집단의 아이들에게 비난을 받고 소외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내성적인 성격에 다른 친구들에게 말을 걸거나 잘 다가가지도 못했고, 부끄러움도 많아서 매일 혼자 고개를 숙이면서 지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다른 애들이 점점 이상한 아이라면서 놀리기 시작했고 그 아이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힘 있게 항변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점점 반에서 있는 듯 없는 듯 겉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달의 시간이 흐르며 그 친구는 '바보'라는 낙인이 찍혀 혼자 지내는 사이 나는 또래들과 어울려 다니는 평범한 아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내가 그 친구에게 다가가게 되었던 건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야외에서 찰흙으로 조형물을 만드는 미술 수업이 있던 날 그 친구가 미처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아 가장 뒤에 있는 자리에서 혼자 입술을 오므린 채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봤던 나는 찰흙도 필요 이상으로 넉넉하게 샀겠다 함께 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뒷자리로 성큼성큼 다가갔고 그런 나의 행동을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던 그 친구는 내가 찰흙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나 찰흙 많으니까 이거 같이 쓰자!"라고 하는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찰흙을 쪼물딱 거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똑같지만 어릴 때의 나 역시 미술적인 재능이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혼자 찰흙으로 바닥에 빈대떡을 부치고 있었는데 반대쪽을 보자 그 친구 앞에는 스테고사우루스 한 마리가 늠름한 자세로 서 있었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와~! 이거 뭐야? 진짜 잘했다!"라고 말을 했는데, 나의 목소리가 컸던지 주변에 있던 친구들의 시선들이 전부 그 친구가 만든 조형물로 향했고 마치 도예가의 시범을 보는 것처럼 모두가 자리 주변에 둘러서서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그 친구는 이전과 같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숙인 얼굴에는 부끄러움과 함께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 친구는 방과 후에 흙장난을 치거나 놀이터에서 놀고 싶을 때에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서 "같이 놀자"라고 말을 걸어 주었는데 나도 싫지 않은 마음에 어울리다 보니 점점 친해져서 초등학교 때 단짝이 되었고,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과도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어서 이전과는 다른 밝은 아이로 성장을 하게 되었다. 처음 서로가 친해지고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나는 그 친구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다르게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을 느꼈는데, 가끔은 상상력이 지나치게 과해서 알아듣기 힘든 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흥미로워하며 칭찬을 해주었고, 그 친구는 그런 내 모습에 기뻐하며 자신이 가진 더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곤 하였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는 그 친구와 작별하면서 깊은 아쉬움과 함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는 바보가 아니라 그냥 다른 친구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다른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또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날의 내가 편견을 가진채 살았다면 결코 이 친구와 우정을 나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에 지금의 나는 섣불리 판단하는 습관을 경계하고 잘못된 편견을 가지는 것을 멀리하게 되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분명 잘못한 것이 맞지만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의 그 사람이 겪어온 삶이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행동은 그리 성숙하지 않은 모습일뿐더러 깊은 진실로부터 등을 돌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니까.


 오늘도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인터넷 뉴스가 시끄럽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고, 아직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댓글에서는 벌써부터 일방적인 마녀사냥과 목적 없는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모든 사건을 가장 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이는 잘못한 일들에 눈을 감고자 하는 것이 아닌, 잘못 그 너머의 마음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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