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따뜻하고 온유하지만 동시에 차가움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따뜻하지만 차갑다니, 이런 아이러니함이 정말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조금 의아해할 수도 있으나 왜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조금 더 자세히 서술해보고자 한다.
1. 사람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따뜻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성과 관련된 것인 경우다. 나는 보통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만 도덕적으로 그른 행동을 하는 사람의 경우 최대한 마주치려 하지 않게끔 일정을 조정한다거나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일상에서 지워버릴 때가 있다. 만약 이런 과정 중에 도덕적으로 어긋나 있는 사람이 화두에 오르면 평소의 친절하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대답이 아닌 다소 차갑고 시니컬한 반응을 내비친다. '비도덕적이다'라는 척도에 대해서 어디까지를 허용하는지에 대해 궁금할 수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그릇된 도덕성'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가벼운 장난을 뜻하는 것이 아닌, 모와 도의 구분만큼 확실한 차이가 있는 행동을 기준으로 한다.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심각한 상해를 가한다거나 폭언과 욕설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이른바 '형사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비도덕적인 사람'의 범주에 두는데, 정말 이렇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변 사람들의 짓궂은 장난도 그냥 웃으며 넘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다.
2. 관계에 대해서
관계에 대한 부분에서 상이한 두 가지의 온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관심의 영역'이라는 테두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시간 상대방과 지내면서 나와 상대방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고 내가 하루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만큼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깊게 생각하게 된다. 이 두 가지에 대한 성격이 조합이 되면 무의식 속에 관계에 대해 정의하는 어떤 영역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관심의 영역'이다. 내가 관심을 기울이거나 내게 고마운 사람들은 항상 이 영역 안쪽에 위치하며, 실망스러운 사람이나 이제 마주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이 영역의 바깥쪽에 위치한다. 나는 내게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불필요한 사람들에게 쓰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영역에 위치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밝음과 따뜻함을 유지하고 동시에 내 영역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차갑게 대하게 된다.(물론 처음 본 사람에게도 기본적인 친절함을 베풀긴 하지만, 온도에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런 영역의 개념과 그에 따른 행동 패턴 때문에 '관계'에 대한 부분에서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게 된다.
3. 목표에 대해서
나는 목표를 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고심한다. 흥미에서 시작된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들을 모두 모아 서로 비슷한 것이나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한 목표는 우선 쳐낸다. 그리고 '이것은 이룰 수 있겠다'라고 최종 선정된 목표에 대해서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시도하게 된다. 이렇게 바로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결정한 것은 반드시 이룬다'는 목표의식과 '이룰 수 있다'라는 확신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계속 뜨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어긋난 것이 없는지에 대해 굉장히 차갑게 판단하고 이를 제어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라는 말처럼 목표를 시행하는 것에는 뜨겁고 저돌적이지만 그 과정에 부끄러움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상을 받는 것이 목표라고 했을 때, 입상은 못하더라도 매년 도전하는 행위는 전혀 부끄럽지 않지만, 상을 받기 위해 타인의 아이디어를 훔쳐온다거나, 상대방을 방해해서 지연시키는 등의 행위는 일절 용납하지 않는다. 이 간단한 예시에서 알 수 있듯, '목표'에 대한 부분에서는 이런 뜨겁고 저돌적인 행동력과 차가운 절제가 섞여 나아가기 때문에 상이한 이 두 가지 온도가 공존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