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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Oct 26. 2022

가스레인지가 없는 집

 이사를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내 집에는 가스레인지가 없다. 본디 부엌의 모습이라 하면 달궈진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내가 사는 곳은 조금 다르다. 주방이라 부를만한 공간에는 몇 개의 조리도구와 향신료 등이 쓸쓸한 적막을 감추고 있을 뿐, 우리가 흔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들이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방문객들이 이런 풍경에 당황할 때가 있지만 나는 더 이상 내 공간이 낯설지가 않다. 왜냐하면 익숙함이라는 감정이 자리 잡을 만큼 긴 시간이 내 삶을 스쳐갔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집에 가스레인지를 두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나는 딱히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다 갖추고 사는 것을 편하게 여긴다. 하지만 상황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 흘러가 버렸다. 몇 번 이사를 경험한 탓에 새로이 자리를 잡을 이 공간에도 낡은 가스레인지라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이곳은 말 그대로 그냥 콘크리트로 된 텅 빈 공간에 가까웠다. 살짝의 푸념으로 무언가 옵션이 좋은 다른 집을 알아보려고 해도, 당시에는 '전세 대란'이라는 말이 뉴스를 가득 채웠을 정도로 집을 구하기 어려웠던 때라 다른 집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은 등 떠밀리듯 이 집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사를 오게 된 첫날. 이삿짐 옮기는 걸 도와주러 온 친구들과 함께 원래 있던 가구들을 배치하며 필요한 것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나, 새로 구매가 필요한 것들을 몇 개 떠올리긴 했으나 꼭 필요한 게 맞는가 하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온 가스레인지에 대한 이야기. 친구들 중 한 명은 가스레인지가 꼭 있어야 한다며 필요성을 제시했으나 나는 이상하게 공감이 되지 않았다. 이전까지의 삶을 되돌아봐도 가스레인지를 썼던 것은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몇 년째 하루 한 끼의 식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주방에서 조리를 할 필요도 거의 없거니와 비용 또한 2~30만 원을 소모해야 했기에 과연 내가 가격만큼의 효율을 뽑아낼지가 의문이었다. 결국 조금 더 이 집에 살아보면서 가스레인지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면 그때 구매해도 늦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친구들도 나의 의견을 존중하여 가스레인지의 구매는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그렇게 살아본 한 달은 의뢰로 여유가 있었다. 집에 가스레인지가 없으니 무언가 불편한 감정들이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오지 않을까 염려를 했는데 마주해본 현실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가스레인지가 없으니 복잡하게 조리해야 하는 것들이나 바로바로 소비해야 하는 식자재 등을 사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조리 도구도 있어야겠다 싶은 것들만 딱 사다 보니 지갑이 두꺼워졌다. 또 공간 활용에 대한 생각이나 먹는다는 것에 대한 욕구 등, 일상에서 떠올리는 감정들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나를 세상에 맞추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세상을 자신에 맞추려고 하다가 괴리감과 좌절 때문에 짜증을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거대한 세상을 자신이 보기 좋은 형태로 모두 바꾸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 그러다 보니 나는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세상에 순응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는데, 존재하지 않는 가스레인지가 내 안에 깨달음의 불꽃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안에 불편한 감정이나 욕심들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행동이 흐름 안에서 지나치게 역행하는 것은 아닌지, 또 내 역량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말이다.


 오늘도 나는 텅 빈 부엌을 보며 '나쁘지 않네'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출근을 한다. 비면 비는 대로 가벼움을 느끼는 내 마음이 이제는 퍽 살갑게 느껴진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금의 내 삶이 그렇듯, 일상에 찾아오는 모든 부족함은 언젠가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잠깐은 허전할 수 있으나 우리는 결국 그 상태에 적응하고 그것을 즐기게 되어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있으면 감사하면서 살자. 그것이 삶을 즐겁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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