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다 Aug 18. 2022

도서관, 사랑방이 되다

 도서관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면 학생들 외에도 다양한 손님들을 만날 수 있다. 옴니버스 형식의 드라마처럼 제각기 썰을 풀고 가는 사람들. 그 때문에 조용할 것 같은 도서관에는 항상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사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낯설긴 했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조용하면 오히려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익숙해졌다. 지식을 채우는 공간을 넘어 소통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도서관이 살갑게 느껴지는 요즘. 나는 이 조용하던 공간이 어떻게 사랑방처럼 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도서관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음을 처음 깨달았던 것은 대학원 도서관에서 근무를 할 때였다. 국내외 학생 할 것 없이 사람이 즐비한데도 넓은 도서관을 지키는 직원이라고는 오직 나 혼자. 거기다 수천만 원대의 고가 소프트웨어까지 관리해야 했던 조금은 특이한 사서직이었다. 이 도서관에서 겪었던 초기 한 달 동안의 모습은 여느 도서관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고, 그저 조용하기만 한 공간. 직원을 마주치는 것도 학교에 귀빈이 오신다거나 세미나가 있을 때, 유인물을 프린트하고 제본을 하기 위해 간간히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직원분들이 몇 번 도서관을 둘러보며 사람이 잘 오지 않는(쉬기 적합한) 장소라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한 이후부터 점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점심을 먹기 위해 도시락을 싸들고 오시는 직원부터, 낮잠을 즐기러 오는 직원분들까지. 도서관은 그렇게 조금씩 조용함과 비밀스러움을 찾는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어갔다.


 대개 직원분들은 개인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또 내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있다가 가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내가 인사도 할 겸 찾아오시는 분들께 매번 커피를 한 잔씩 타서 드리자 닫혀있던 소통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적게는 학교 생활에 대한 조언이나 유익한 경험들을 얘기해주셨고, 신뢰가 쌓이자 부서 간의 갈등이나 상사와의 고충 또한 터놓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도서관에는 일상의 이야기들. 특히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터놓는 깊은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 갔다. 예를 들자면 실무부서의 직원들은 매번 지침을 쏟아내는 보안부서나 무조건 안된다는 말부터 꺼내는 재정부서에 대한 불만을 많이 이야기했다. 반대로 재정부서는 일을 먼저 벌여놓고 규정은 나중에 확인하는 실무부서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이외에도 행정부서는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감사부서를. 학교 행정직원들은 '내가 하겠다는데 왜?'라는 마인드로 밀어붙이는 교수들을 싫어하는 등 저마다의 얽히고설킨 고충이 많았다.


 그중에서 직원들의 공통된 고충이라고 한다면 상사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임급의 직원은 대리를. 대리는 과장을. 과장은 차장이나 팀장급의 직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고민이 없을 것 같은 팀장급 간부분들도 아랫사람들을 어려워하긴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사유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각자마다 다른 일처리 방식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어려워 갈등이 빚어지는 것이 대다수였다. 이처럼 직원들은 대학원 내에서 저마다의 이야기가 쌓일 때마다 한숨을 돌리거나 나름의 한풀이를 하러 도서관에 종종 방문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도서관이 책을 읽는 조용한 장소에서 벗어나 이처럼 활기를 띄는 공간이 된 것이 무엇 때문일까를. 그동안의 일상을 곰곰이 따져보니 그 이유는 아무래도 도서관이 가진 어떤 특성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경청해주는 상대방도 중요하지만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비로소 사람은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가? 어찌 보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라고는 (매일 집과 도서관만 오고 가는) 사서 한 명뿐인 데다가, 본인을 제외하고는 도서관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니, 직원들은 그런 신뢰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던 탓에 도서관을 사랑방처럼 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학교 도서관으로 왔지만, 혼자서 넓은 도서관은 관리한다는 특성 때문인지 이곳 또한 점점 사랑방으로 거듭나고 있다. 미화원이나 청경분들은 학교 관리 전반에 대한 이야기나 행정적인 고충을. 선생님들께서는 버릇없는 학생에 대한 이야기나, 개인적인 고민들을 말하러 오신다. 물론 교무실보다 온도가 쾌적하고,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개인 노트북을 들고 오시는 선생님들도 수두룩한데, 나는 이 모든 모습이 그저 반갑기만 하다.


 직장 상사의 성향에 따라 집단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지만 도서관만큼은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지금처럼 조금은 자유롭고,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물론 떠들썩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추구하다 보면 누군가는 '사서들은 편하게 일하네'라는 편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덕분에 한가해 보이는(?) 사서에게 말을 많이 걸어준다면 오히려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서관에 자주 와야겠다."라며 능청스럽게 자리를 잡는 직원분이 계신데, 부디 이 분위기가 이어져 앞으로도 도서관은 편한 곳이라는 인식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생님의 회초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