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글이 안 써지는데 원두도 떨어졌을 때

by 영점오

브런치 작가 신청에 합격하고 좋아라 하며 이틀새 네 편의 글을 올렸다. 미리 저장해 둔 글들은 심사 시에 작가의 서랍에 넣어둔 두 편을 제외하고는 없어서 새로운 두 편의 글은 지난 하루 동안 즉흥적으로 쓰인 것이다. 3일째가 되니 그렇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자취를 감추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글이 안 써지는데 설상가상으로 원두도 떨어져서 커피 한잔 할 수 없다. 믹스커피는 있지만 오늘따라 씁쓸한 기분을 여과 없이 느끼고 싶은 건지 달달한 게 그다지 당기지 않는다. 한참을 여기저기 뒤적인 끝에 선물로 받았던 동남아시아 인스턴트커피 한 봉지를 발견하고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얼른 검은 가루를 털어 넣었다.


글이 안 써지는데 원두도 떨어졌을 때 평소라면 찾지 않을 인스턴트 블랙커피가 나의 마음을 친절하게 위로한다. 여기까지 두서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역사가 있으신 작가님들은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빤히 보일 것이다.


글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지만 이상하게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누군가 가르쳐주면 이상한 거부감이 속에서부터 불쑥 올라오곤 했다. 대부분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겠지만 바둑을 두더라도 집 바둑(정교한 형세판단으로 한두 집을 이기면 만족하는 실리적인 스타일) 보다는 전투적인 바둑을 감으로 두는 것이 재미있다.


며칠 전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고 심사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대형서점에 들렸던 적이 있었다. 거기서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소모해야 하기에 베스트셀러부터 여러 종류의 서적들을 보다가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들에도 눈길이 머물렀다. 두세권 꺼내 들어 목차와 내용을 살피는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플롯'이라는 단어 하나 밖에는 없다. 나도 성실하게 무언가를 배우고 시행착오를 줄여나가는 삶이 효율적임을 모르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작가들이 글을 쓰다 보니 이렇게 해야 하더라는, 경험과 지식에 의하여 추출된 정보들이 내가 좋아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을 뿐이다.


소설을 쓴다면 많은 예비작가들이 범하는 실수 중에 하나가 뼈대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쓰다 보니 이야기가 산으로 가거나 산비탈에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떡밥들만 남기고 결말을 맺지 못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과 함께 모든 가능성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작가의 손에 의해 예정된 길을 억지로 걸어가야 하는 주인공만큼 비극적인 인생도 없을 것이다.


게으른 사람의 비겁한 변명처럼 보이더라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 또한 하나쯤 있어야 문학이라는 세상 속의 무지개가 피어나지 않겠냐고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어떠한 개똥철학이나 유연함이 떨어지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전에 건설적으로 기본기가 탄탄한 지식은 받아들여야 함을 인정하며 존중한다.


다독, 다작, 다상상과 함께 깊은 통찰력을 얻기 위하여 철학적인 소양은 필수일 것이다. 판타지 소설과 무협소설에도 인간적인 고뇌가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지고 있다면 한 편의 재미있는 인생수업을 들은 것과 같다고 믿는다.


모든 예술에는 각각의 개별적인 영역으로서 존중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높고 낮음의 경계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소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큰 감동을 일으키는 작품들을 우리는 명작이라고 칭하며 희소한 가치를 부여한다.


글을 쓰다 보면 분명 나아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진장 씁쓸한 커피가 많이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담배를 끊은 지 십이 년이 지나고 보니 커피가 담배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쌓인 긴장(스트레스)을 풀기 위해 찾는 것이다.


앞으로 글이 안 써지는데 혹시나 오늘처럼 원두가 떨어진다면...


그냥 넷플릭스나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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