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한 주변과는 달리 지어진 지 25년~30년 정도 된 저층 아파트들이 정겹게 모여 있는 곳, 지척에 언제라도 오를 수 있는 풍경 좋은 산이 있는 조용한 곳이 있다. 곳곳에 신축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더 복잡해지고 번화해졌지만 그 동네만은 그대로이다. 여전히 시골스러운 맛이 남아 있는 그곳을 우리들은 중산동막골이라고 부른다.
이사 후 가장 큰 걱정은 전학을 한 아이였다. 4학년 2학기 후반에 전학을 했으므로 저학년 때부터 이미 형성된 친구들의 모임에 합류하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엄마나 아이나 그리 넉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친구 없이 덩그마니 혼자일까 전전긍긍하던 때였다. 그럴 즈음, 용기를 내어 들어간 곳이 교내 도서부였다. 책대여와 반납을 관리하고 책정리를 하는 엄마들의 봉사모임에 들어간 것은 오로지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엄마의 강한 의지가 담긴 노력과 용기였다.
전학오기 전, 팍팍했던 삶을 살며 안팎으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는 물론 도서관조차도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가지 않았으니 아이를 위해서는 빵점짜리 엄마였다. 게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삶의 질과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던 터라 더더욱 누구에게나 소심했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입학한 아이는 친구들과 집을 오며 가며 잘 지내 주었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이의 친구 엄마도 만났으니 됐다 싶었다.
하지만 4학년을 마무리할 무렵 다른 지역으로의 이사와 전학은 좀 다른 문제였다. 오직 내 아이만을 위해 들어갔던 도서부, 그 일이 한해 두 해를 보내며 물기 쏙 빠져 푸석거렸던 삶을 촉촉이 채워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때였다.
물론, 대인 관계 울렁증까지 있던 나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적응하는 시간 동안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에너지 소모와 사람들로 인해 알 듯 모를 듯한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활동은 잠재되어 있던 긍정적이면서 적극적인 내적 기질을 서서히 수면 위로 끌어올려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서부 활동은 빛그림 공연부 일원으로서, 책 읽어주는 엄마로서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내 아이만을 위해 시작한 활동은 다른 아이들의 즐거움과 행복까지 생각하도록 마음을 확장시켜 주었다. 그리고 도서부 봉사를 하며 가까워진 인연 덕분에 엄마들과 아이들이 함께하는 유의미하면서도 유익한 활동인 내 맘대로라는 모임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내 맘대로는 외부로 알려진 공식단체가 아니었다. 뜻을 같이 하는 동네 엄마들과 아이들의 소모임이다. 역사, 자연, 환경, 체험, 놀이등으로 교감하고 즐기면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기에 이름도 내 맘대로였다.
아이들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부분 성인이 되면서 그때의 활동은 퇴색이 되고 내 맘대로라는 이름만 남았지만 선한 영향력은 부모와 아이들의 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 관련 체험활동과 놀이, 핼러윈데이가 아닌 우리만의 방식으로 바꾸어 만들었던 놀이활동인 할거리데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동텃밭, 어른들의 리드와 아이들의 주도적인 참여로 나온 아이디어를 통해 만들고 모은 물건들을 벼룩시장에서 판매를 해보기도 했으며, 각 가정마다 나오는 폐지와 헌 옷들을 모아 재활용 센터에 판매하여 모인 수익으로 매년 연말에는 함께 연탄봉사를 했다. 의미 있는 일들이어서 더 열심히 했고 그만큼 보람도 컸다. 종종 아이와 그때를 추억하곤 하는데, 마지못해 따라와 주었겠거니 하는 어른의 생각은 잘못되었구나를 입증해 주는 순간들이었다.
초반에는 아이들과의 활동이 엄마들의 몫이었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아빠들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거국적인 공동육아의 개념은 아니었더라도 같이 동네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십시일반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었다.
폐지는 차량과 시간이 가능한 이웃이 돌아가며 집마다 수거를 해서 재활용센터로 가서 팔았다. 1층에 사는 이웃은 센터에서 수거하러 오는 날까지 각 가정에서 맡긴 재활용옷들을 보관해 주었다. 베란다에 헌 옷이 쌓이는 것은 먼지와의 전쟁이었고 번거로우면서도 힘든 일이었을 테지만 흔쾌히 어려운 몫을 해 준 이웃 덕분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옷을 내놓기 전에는 입을 만한 옷들과 신발 가방 등 등은 다시 필요한 이웃들이 고르기도 했다. 어제까지는 내 물건들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다른 이웃과 아이들의 옷으로 가방으로 신발로 재탄생되었다.
지금도 종종 만나는 이웃들은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 시절처럼 공동체로서 함께 움직이지는 못한다 해도 개인들이 잊지 않고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미친 영향은 해를 거듭하며 차고 넘칠 수밖에 없다. 공부가 일 순위가 아니었던 부모와 아이들이 즐기며 활동했던 시간들은 긍정에너지의 원천이 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미미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던 작은 동네의 날갯짓은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리며 열매를 맺었다. 아이들이 떠나 간 자리에는 부모들만 남아서 작게나마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옷들을 나눠 입고 쓰임이 다한 물건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내어주며,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들은 공유를 한다. 그 시절 열정은 희석되었을지라도 가려진 곳에서 조용히 실천하고 있는 동막골 이웃들이 자랑스럽다.
중산 동막골이란 마음속 작은 섬은 소박하고도 풍요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어느 곳일지 모를 망망대해를 이웃들과 함께 꿈을 좇으며 유영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두 번째 운을 내어 준 곳으로 이사를 한 지 3년이 되어가고 있다. 늘 마음이 닿는 곳, 중산 동막골이 지척이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