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에 결혼을 했다. 결혼 생각 없이 지내던 나는 서른을 넘기면서 부모님과 주변인들의 채근을 많이 받았다. 결혼 적령기를 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이야 결혼 적령기가 따로 없지만 그 시절에는 대단한 걱정거리였다. 게다가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던 때였다. 지금이야 비혼이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원하지 않아도 존중해 주는 분위기지만 그때만 해도 사회통념을 거스르기가 웬만한 내공 아니고는 힘들었다. 주변인들의 기준보다는 다소 늦기는 했어도 결혼은 했으니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임신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직장을 다니고 있는 중이기도 했고 신혼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피임을 하며 서두르지 않았다. 아기를 기다리는 어른들의 기대를 외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임신을 하고도 순탄한 출산으로 이어지기 힘들거나 아이를 원하더라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들려오곤 했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마르고 약한 몸이 내내 걸렸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올케언니의 소개로 점을 보았었다. 전화만으로도 가능한 점이라 했다. 신기하게 목소리만으로 약한 몸상태를 짚어 내더니 아이를 갖지 못할 수도 있으니 임신을 서두르라고 조언해 주었다. 좀 무섭기도 하고 믿거나 말거나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내 몸을 콕 집어하는 말은 지나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임신을 위해 건강을 먼저 챙기기로 하면서 늦은 시간까지 근무를 해야 하는 직장을 그만두고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겼다. 나는 오전근무만 하고 퇴근 후에는 운동을 하며 부실한 체력을 키웠다.
임신에 대한 부담으로 채워진 성실한 노력만큼 조급한 마음도 깊었는지, 아이는 금세 들어서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몸이 약하고 나이도 적지 않다며 인공수정을 권했다. 하지만 멀고 험난한 과정이 무서웠던 우리는 거기까지 가지 않기로 하고 마음을 접었다. 한 생명의 부모가 되는 과정을 포기하는 일은 너무도 쉽고 가벼웠다. 아이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좌절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허약한 몸을 원망할까 봐 두려웠다. 아이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자연임신을 했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하는 말이 실감 나던 때였다.
결혼을 결심하기 전까지 비혼주의를 꿈꿨다. 독립적으로 삶을 끌고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무모했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은, 거창한 비혼주의로 포장했을 뿐이지 가보지 않은 결혼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생면부지의 어른들이 어느 날부터 가족이 되는 일, 어려운 관계 속에서 을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에 그 관계 속으로 뛰어 들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 역시도 내 목소리를 내면서 틀을 깨는 사람은 아니었다. 독립적인 인간이라 생각하며 살았던 이십 대 때와는 달리 결혼 후,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그중 하나가 아이문제였는데, 남편은 아이가 없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내게는 시어른들의 기대를 외면할 수 있는 강단이 없었다.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는 심신을 지치게 했었다. 결국,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고서야 몸은 아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찾아온 기쁜 소식도 잠시, 임신 소식을 들은 일주일 만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의 위험으로, 임신말기에는 조산의 위험으로 일주일이 멀다 하고 병원을 다니고 입. 퇴원을 반복했다. 집에서도 내내 누워만 있어야 했다. 어쩌다 하는 외출은 고작 30분이었다. 일주일 내내 종일 천장만 보고 누워 있기도 했다. 한 번은 화장실 변기가 붉은 피로 가득했다. 이제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절망 섞인 오열을 하며 병원에 실려갔었다. 다행히 뱃속의 아이는 무사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간절함의 무게를 감히 비교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간절함이 깃털하나만큼의 무게를 더 지녔던 걸까.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스치는 바람에도 온몸에 통증이 느껴질 만큼 아플 때였지만 아이를 향한 뜨거운 심장이 가장 강하게 뜀박질을 하던 때였다.
그때 만났던 음식이 추어탕이었다. 추어탕은 가성비가 정말 좋은 음식이었다. 가격은 저렴한데 신기하게도 그걸 먹고 나면 기운이 올라왔다. 하루에 대부분을 누워서 있었기 때문에 소화가 그리 잘 되는 편은 아니었지만, 뱃속의 아이는 먹을 것을 계속 요구하는 듯했다. 한 번은 왕소갈비가 너무 먹고 싶었다. 기념일에 시어른들과 함께 외식을 했던 그 식당의 소갈비맛이 침을 고이게 하고 자꾸 생각났다. 그때는 시어른들과 함께 살던 때였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음에도 독립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안되었었다. 시댁도 하나 있는 아들에게 집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친정엄마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서 신혼을 시댁에서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가 살림을 들여놓은 문간방 쪽에 작은 싱크대가 있었다. 임신 전에는 안채 주방에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임신 후 누워만 있어야 하는 나로서는 식사준비를 함께 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밥만 먹고 일어서는 것이 눈치가 보였다.
아이가 어찌 될까 전전긍긍하던 날들만으로도 힘에 겨웠는데 그런 생각까지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먹고 싶은 걸 먹어야겠다는 집념을 이길 수 있는 슬픔은 없었다, 한 번은 우리만 고기를 먹으러 나가는 게 마음이 쓰여서 어른들과 함께 고깃집을 갔었다. 돈이 꽤 나왔다. 작은 회사의 대리였던 남편의 월급만으로 모두를 챙기기에는 많이 빠듯했다. 그 와중에도 나와 뱃속의 아이는 연신 소갈비를 찾았다. 밤낮없이 생각나는 바람에 결국 우리만 몰래 다녀왔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가장 많이 식탐을 부리던 때였다. 그런데 문제는 옷에 배어있는 고기냄새였다. 거기까지는 계산에 없던 우리는 옷에 밴 고기냄새를 날리려 무진장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 산모와 태아의 몸에 좋으면서 경제적인 부담이 덜 했던 음식이 추어탕이었다. 푹 끓인 시래기가 질기지 않아 씹기에도 편했고 갈아 넣은 미꾸라지에서 우러나온 진득한 국물은 거부감이 없었다. 추어탕의 맛에 빠졌었다. 고기를 먹고 나면 입에서는 즐거웠지만 소화가 덜 되는지 더부룩했는데 신통하게도 추어탕은 소화도 잘 되었다.
집 근처에 소문난 추어탕집이 있었다. 건물은 오래된 구옥을 식당으로 개조를 했기 때문에 깔끔하고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마당에는 미꾸라지를 기르는 연못까지 있을 정도로 진심이었기 때문에 믿음직스러웠다. 게다가 주인아주머니는 늘 활기 찬 목소리로 주문을 받으셨고 반찬이 부족하다 싶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면서 살갑게 대해주셨다. 특히 반찬과 함께 서비스로 나오는 추어튀김은 별미였다.
움직임을 최대한 조심해야 할 때는 남편이 냄비를 들고 가서 사 오곤 했다. 그렇게 한 몸인 우리는 틈틈이 추어탕의 힘을 빌어 막달까지 완주를 할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서도 종종 그 집을 들렀었다. 아이가 성인이 된 후에도 몸보신이 필요할 때면 추어탕을 마다하지 않는다. 맛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야 말할 것도 없다. 아플 때도 기력이 없을 때도 별일 없는 평상시에도 종종 추어탕을 찾는다. 몇 번의 이사를 하며 동네를 오래 떠나 있는 동안 ㅇㅇ네 추어탕집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맛을 기억하는 우리는 그 맛을 뛰어넘을 집을 찾지 못했다. 간절함으로 기억된 맛은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다시 그 집이 생각이 난 건 얼마 전이었다. 식당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상호명은 그대로였다. 이십 년이 지나는 동안 식당은 멈추지 않고 성장한 듯했다. 건물이 커졌고 주인아주머니는 국무총리상과 대통령상까지 받으며 명인이 되어 있었다. 오십 중반의 부부와 이십 대의 아들이 추억을 먹는 순간은 뭉클했다. 무사히 보낸 시간만큼 추어탕을 먹으며 그 시간들을 이야기로 풀어놓을 수 있어 신기했다. 구옥(舊屋)의 방에서 먹는 정겨움은 사라졌지만 세월이 비껴간 듯 그대로인 주인아주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고 익숙한 상호명이 그대로여서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아이에게 종종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엄마가 너의 곁을 떠난 후, 기일이 다가오면 추어탕집에 가서 추어탕을 먹으며 엄마를 추억했으면 좋겠다고. 농담이 아니고 진담이다.
지금은 살이 꽤 붙어 후덕한 오십 대 아줌마로 살고 있다. 43킬로의 비쩍 마른 산모는 입덧을 하며 40킬로까지 빠졌었다. 언젠가부터 신년 토정비결도 관심을 안 가질 만큼 점에 무심해졌지만, 그때 점쟁이의 말을 들은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점쟁이로서 점을 봐준 것이 아니라 나의 몸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