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납장을 정리하다 희끗희끗 얼룩진 채로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무쇠솥을 발견했다. 지름 30센티정도 되는 작은 솥이다. 몇 년 전 시골에 사는 언니에게서 얻어 온 솥이었다. 안팎은 녹이 나 있었고 기름 찌든 냄새도 배어 있어 고물상에라도 내놔야 할 판이었다. 그때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냉큼 가져올 만큼 욕심이 났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당 한쪽에 부뚜막을 만들고 큰 무쇠솥을 걸고 싶은데 작은 솥 하나조차도 관리를 못하는 형편이다. 나는 쪼그려 앉아 무릎 위에 올려진 팔에 턱을 괸 채 잠잠이 내려다보았다.
추억은 편애하던 기억이 선사해 준 삶의 선물이었다. 그중 하나가 겨울이면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이었는데, 무쇠가마솥을 거쳐야지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무쇠가마솥은 우리 집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엌의 필수품이다. 반들반들 다져진 흙바닥 위에 방 쪽으로 붙어 있는 부뚜막이 있고 그 위에는 네 개의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대, 중, 소 크기의 솥이 나란히 있고 소여물을 끓이는 가장 큰 가마솥이 하나 더 있다. 더운 계절이 오면 마당에 양은솥을 걸어놓고 밥이며 국이며 대부분을 해결했지만 겨울은 달랐다. 나무 타는 냄새와 음식 향이 밴 뽀얀 김이 아침저녁으로 천장까지 피어올랐다. 날이 서늘해지는 계절이 와야만 볼 수 있는 살가운 풍경이다.
그런데 한 번은 우리 집 부엌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친구집을 다녀온 후부터였다. 흙바닥에 아궁이가 있고 나무나 짚으로 불을 피워야만 되는 부엌의 모습은 내게 늘 당연했었다. 이웃의 부엌들도 비슷한 구조였기 때문에 부뚜막이 없는 부엌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친구집은 달랐다.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친구의 집은 군인관사였다. 부엌이 실내에 있었다. 요즘 아파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바깥에 위치한 화장실만 아니라면 대부분 실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당연히 가마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집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 없었다. 가마솥이 걸려 있는 부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글을 쓸 엄두도 못 냈겠지만 그때의 어린 나는 알 턱이 없었다. 우리 집이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무심한 듯 무쇠솥을 바라보다가 수납장에 다시 넣어두었다. 처분을 할까 했지만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농사를 지으셨던 부모님이 유일하게 마음 편히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실 때는 겨울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김장까지 마치면 그때부터는 종일 여유로우셨다. 농번기가 되면 대부분의 날을 새벽에 나가서 어둑해질 무렵에야 돌아오셨다. 출퇴근의 풍경은 다르지만 요즘의 맞벌이 부부의 일상과 부모님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멀리서 들려오는 경운기 소리만 들려도 길목으로 나가 기다리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하곤 했는데, 나는 밥을 하고 국을 끓여 놓았다. 칭찬에 묻어오는 관심이 티끌만큼 적어도 좋을 때였다. 그만큼 엄마와 아버지는 농사일 때문에 고단하시고 바쁘셨다. 그런 부모님의 겨울과 우리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속살까지 까맣게 그을린 부모님의 흰 피부가 크림을 바른 듯 맨질맨질하게 빛나던 계절이었다. 물기를 없애고 기름칠을 해서 휴식기를 가졌던 가마솥도 겨울이면 제 기능을 하기에 바빴다. 솥뚜껑을 열면 고슬고슬한 밥이 숭숭 구멍을 보이며 밥 내를 풍긴다. 국과 물을 끓이고 소여물에서는 구수한 향이 난다.
요즘은 출출하고 입이 궁해지면 어느 시간이든 나가 해결할 수 있다. 그만큼 대형마트며 편의점들이 곳곳에 눈에 띄게 많다. 온라인으로 장 보는 것도 편리해지니 집에 먹을 간식들을 쌓아놓기도 한다. 하지만 4~50년 전 시골에는 마을마다 한 둘 있는 가게가 고작이었고 그것마저도 겨울밤은 일찍 문을 닫았으며, 겨우 동전 몇 개로는 군것질이 고픈 허기진 입을 양껏 채울 수도 없었다. 집에서 만든 겨울 간식은 돈도 절약하고 우리들의 심심해하는 입도 해결하고 동네분들이라도 마실 오시면 뭐라도 대접하기에 좋았다. 부모님은 명절이 다가오면 겸사겸사 간식들을 만들 준비를 하셨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만 살아낼 수 있는 계절의 속 깊은 맛은 엿, 강정 그리고 약과, 술빵이었다.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가물가물한 노모의 기억과 쪼그려 앉아 엿물을 받아먹던 어린 나의 추억을 봇물처럼 터트리며 그때를 더듬어 갔다.
“쌀을 멀겋게 죽을 쒀 놔. 쌀을 물에 담갔다가.. 그전에는 맷돌에 갈었잖어. 시방은 방앗간이 있으니까 편하지.. 방앗간이 없을 때는 맷돌에 갈아서 했거든. 맷돌에 갈기 전에 물에 씻어 담가야지. 그래야 맷돌에 갈리지. 아휴.. 그전에야 방앗간이 가깝기나 하니? 시방이야 방앗간도 가까우니까 맷돌에 안 해도 되지. 그전에야 맷돌에 죄 갈아서 하고 두부도 갈아서 하고 그랬지 모.
멀겋게 갈아다가 질금 가루를 쬐끔 섞어놔. 많이 안 섞구. 가마에 끓여서 멀겋게 죽을 쒀요. 뜨거운 데다 질금을 넣으면 질금이 데서 안되거든. 그럼 손 담가서 데지 않으리 만치. 그니까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 와서 질금을 아주 쬐금 넣고 묽게 죽을 쒀야 해. 멀겋게 쒀야 해. 되게 쑤면 엿이 잘 안돼.
그걸 다시 퍼서 식혀. 손을 담그면 데지 않아야 하거든. 식으면 도로 가마에 넣어. 엿질금을 물에다 휘휘 타서 더 섞어야 해. 그래야 삭지. 손이 안 델 정도로. 뜨거우면 엿이 안돼. 너무 차도 안되니까 아궁이에 불을 조금씩 때면서 꽤 오래 삭아야 해. 그렇커면 아주 말갛게 참방 가라앉아. 그렇커면 걸러 가지고서는 뭐야 그 자루에 짜서는 체로 받쳐가지구 그 물을 자꾸 졸이면 엿이 되지 모”
가마솥 안에서 달큰한 향이 나면 부엌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 기다렸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연갈색의 그것을 한 국자 떠서 그릇에 담아 주시면 등짝은 추운데 목구멍부터 뜨겁게 달궈졌다. 조청이 되기 전에 맛볼 수 있는 엿물이었다. 조청이 되면 부뚜막 앞에 서서 끈적하고 달달한 그것에 가래떡을 찍어 먹었다.
“조청은 꿀모냥 떡 찍어 먹는 거지. 아니 조청 되기 전에 엿물 끓이다 먹으면 달겠지. 엿은 졸이다 보면 재갈거품이라고 조그맣게 모래알처럼 거품이 생겨. 자꾸 불을 때면.. 이제 모야.. 콩알처럼 더 크게 거품이 생기구. 자꾸 더 졸이면 거품이 점점 더 커지면서 야중에는 펄떡펄떡 이불모냥. 그때는 지푸라기로, 불을 아주 조금씩 떼야해. 그럼 이불모냥 불룩하게, 빵모냥 부풀다가 털썩하고.. 그 정도 되면 펐다가 굳히면 엿이 되지.”
손바닥만 하게 넓적한 모양으로 만들어 굳힌 엿은 서로 달라붙지 않게 콩가루를 뿌려서 광에 보관을 했다. 콩가루조차도 수확한 콩을 집에서 볶아 맷돌에 갈아 만드셨다고 하니 그 고소한 맛이 지금도 남아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추운 겨울밤 굳어 있는 엿을 한 두 개씩 가져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작은 망치로 톡 친다. 먹으리 만치 작게 조각난 엿조각을 입에 넣는다. 침이 엉겨 붙으며 물컹하고 쫀득한 엿의 첫맛은 고소하고 끝맛은 심심하게 달달하다. 요즘의 엿이 많이 달게 느껴지는 것은 그때 그 맛을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 그때 만든 강정은 안 달고 맛있어. 근데 시방 쌀은 튀겨지지도 않아. 그때는 벼를 낫으로 베서 해에다 말렸거든. 그래서 잘 튀겨졌었나 봐. 지금은 기계에다 전부 말려서 그런지 튀밥으로 잘 안 튀겨지는 것 겉어. 그때는 멍석이고 포대고 그 위에 말렸는데, 지금은 농사짓는 것 같지도 않아. 다 기게에다 하구. 편하지 모.
찹쌀에 이것저것 섞어서 반죽하고 방망이질을 하면 꽈리같이 일어나. 찹쌀을 빻아다가 술도 넣고 뭐 더 넣는 게 있어. 뭘 더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나. 동네 할머니가 와서 반죽을 해줬거든. 그걸루다 반죽을 해서는.. 삶아서는 내따 방맹이루다 짓 찧으면 그게 불룩불룩 일어나요. 그럼 그걸 가루에다 쪼옥 펼쳐놓고 넓죽헌 걸 짤라내서. 손가락만 하게 잘라서 그러케서 방에다 말려. 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가서 다 터지니까 문 꽉 닫고 더운 데서 말려. 그럭케선 기름에다 튀기면 불룩불룩 다 일어나지 모. 그러면 조청을 과서 발라가지고. 그전에는 쌀을 튀겨서 굴려. 지금은 기계에다 말려서 쌀이 안 튀겨져. 그래서 집에서 해 먹으면 맛있는데 사서 해 먹으면 맛이 없어. 손가락 강정은 쪼그맣게 잘라하고 자반은 크게 해서 말리구. 집에서 만드는 거야 얼마나 맛있냐. 집에서 엿 과서 하면 안 달고 맛있지. 입에다 넣으면 아주 맛있어. 근데 지금은 달기만 하고 맛이 없어.”
방이 하나였다. 불을 때어서 절절 끓는 아랫목에 손가락만 하게 잘라진 반죽을 가지런히 나열해서 펼쳐놓았다. 그때는 방을 들락거릴 때마다 야단을 맞은 이유를 몰랐다. 엄마가 방문을 빨리 닫으라고 하시면 혼날까 봐 턱이 있던 방으로 껑충 뛰어 들어가면서 얼른 닫았던 기억이 있는데, 반죽이 터질까 봐서였다니. 우리도 꽁으로 강정을 먹지 않았다. 땀이 뻘뻘 날 정도로 뜨거운 아랫목에서 데일 것 같은 발바닥을 이리저리 포개가며 하나씩 손가락만 한 반죽을 나란히, 가지런히, 빠뜨리는 것 없이 뒤집어야 했다. 서로 순서를 정해서 번갈아가며 뒤집었다. 바짝 마를 때까지 몇 번씩 반복을 했다. 아버지는 귀찮은 걸 왜 하냐고 타박을 하셨다는데 내 기억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시면서 엄마를 도와 무언가를 열심히 하신 기억밖에 없다. 엄마가 조청을 발라 주시면 쌀튀밥 위로 데굴데굴 굴렸다. 장날에 나온 뻥튀기 아저씨한테서 튀겨온 통통한 튀밥이 조청에 찰싹찰싹 잘 달라붙었다. 그러면 손바닥 크기만 하게 제 멋대로 모양을 가진 쫀쫀하고 달달한 강정을 먹을 수 있다.
약과는 또 어떤가. 얼 비추는 형광등이 밝혀주는 겨울밤, 엄마와 오빠 셋이서 상에 둘러앉아 엄마가 마름모꼴 약과 모양을 빚어주면 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어야 잘 익는다고 하셨다. 정말 지루했다. 끝이 안 보이는 반복 작업을 엄마도 우리도 졸면서 했다. 그 기억이 생생한 건 아마도 졸음을 참아가며 만든 약과가 생각보다 맛이 없었기 때문 일 것이다.
“약과도 반죽을 해야 해. 허긴 했는데 이제는 잘 기억이 안 나. 거기도 이제 여러 가지가 들어가, 반죽할 때. 약과는 기름에다 튀기고. 옛날에는 기름이 많이 없으니까 기름에 튀기지 못하고 그냥 밀가루 반죽을 해서는, 조청에다 반죽을 해. 가마에다 말려서는 애들 군것질이라고 하나씩 집어주면 먹었지. 근데 그건 맛이 들해. 기름에 튀겨야 맛있지. 근데 누가 시방 그렇게 허니. 잔치 집에나 가야 먹지. 기름에 튀기면 아주 맛나. 근데 난 사는 것도 연해서 좋긴 한데 요즘 껀 달아서 못 먹겠어. 약과는 요즘에 집에서도 만들 수 있을 거야 근데 모 귀찮아서 만드냐“
강정과 약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조청이 필요했다. 조청을 만들려면 엿기름이 있어야 했다. 요즘은 엿기름가루를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매장, 농장 직판, 주변에 있는 방앗간에서 쉽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엄마는 직접 만드셨다고 한다. 엿기름을 집에서 만드셨다니 놀라웠다.
“그전에 나는 싹을 길러가지고 했지. 밀이나 보리를 불거서 싹을 틔워. 싹이 길다랗게 손가락만치 나오지. 그걸 말려서 갈아가지고 하면 여간 잘 삭아? 근데 시장에서 하는 건 아무 케도 싹이 들 난 건지 그만 못해. 시루에 길러야 해. 시루에 콩나물처럼 길러. 콩나물은 물을 주는데 이건 물을 안 줘. 물을 주는 게 아니고 며칠에 한 번씩 꺼내서 씻어서 다시 넣어. 싹이 잘 나야 잘 삭거든. 그걸 빼짝 뿌리까지 말리면 잘 바스라져. 아주 잘 삭아 “
엄마의 언어로 들려주는 겨울맛은 투박했어도 틈틈이 섬세했다. 술빵도 맛있었다는 말에 아흔여섯의 엄마는 내가 술빵도 만들었냐며 되물으셨다. 그러시면서 만든 술로 술빵을 만들었던 이야기를 쉼 없이 하셨다. 선택된 기억의 파편들은 기력이 쇠하셨던 노모에게 잠시 힘을 실어 주었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열 살부터 남의 집 수양딸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지낸 고단했던 세월을 잊고 자식들에게 따뜻한 겨울맛을 남겨 준 그 기억만 가지고 계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근데, 그런 건 뭐할라구 물어보냐..?”
작은 무쇠솥에 조청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잊히지 않는 그 엿물 맛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그리고 조청을 만들고 엿을 만들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했었다. 겨울을 기억하게 하는 맛은 아무래도 날이 풀리는 봄에나 가능할 듯하다. 우선 녹슬고 볼 품 없어진 무쇠솥을 말끔하게 길들여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부지런함은 물려받지 못한 듯 겨울은 한없이 춥고 우리를 게으르게 한다. 엿을 만드는 날까지 무쇠솥은 잘 모셔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