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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Feb 10. 2022

웨이든의 강하(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가장 진솔한 사실적 그림

 로히에르 판데르 웨이덴[El Descendimiento. WEYDEN, ROGIER VAN DER.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혹은 “하강”. 1443. P0]

 

    르네상스는 초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했지만, 잠시 벨기에를 지칭하는 플랑드르로 올라가면서 유화와 접하게 되고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템페라와 유화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 플랑드르의 기법들은 세밀화, 사실화 등으로 표현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그림들의 원리 덕분이다. 바로 유채 기법으로 불리는 유화이다. 템페라는 빨리 마르는 성질로 인해 그림이 섬세한 작업이 어렵고 부드러운 중간의 다양한 색을 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목판에 스며드는 기름의 성질을 어떻게 극복해 내야 할까? 가 제일 고민이었다.


    가이드를 하면서 플랑드르 미술과 이탈리아 미술의 차이를 책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니 많이들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과적으로 학문적인 내용이니 쉽게 그림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해 보았다. “르네상스가 시작은 되었는데, 이탈리아야 그리스로마의 문화가 있었으니 그냥 가져다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플랑드르는 아무리 찾아봐도 과거에 그럴싸한 것이 없다 보니 있는 그대로를 그려보자 해서 사실화의 그림이 되었고 그 사실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고 세밀하게 그린 것이다.” 화가들은 모두가 이해되도록 그렸는데, 왜 우리의 설명은 이렇게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로 떠들라면 현장에서 지치지 않고 하겠는데, 글로 쓰려니 참 복잡하다.


    이 그림은 로베르트 캉팽과 얀 반 에이크의 영향력 속에 가장 완성도 높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그린 것이지만, 이전 플랑드르의 주된 목표는 사실적인 감성의 전달이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배경이었다. 웨이덴은 이 그림에서 과감하게 그 배경을 삭제한 것이다.


    사수협회의 주문을 받아 그린 이 그림 속 특징은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사수협회란 활을 다루는 모임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웨이덴은 역시 그 의미를 그대로 그림에 부여해 누가 주문했는지를 한 눈에 알게 해 버렸다. 바로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자세다. 균형적인 일치를 보이는 두 몸의 구조와 팔이 마치 활의 모양처럼 되어 있는 이 구조를 보면서 완벽한 균형미를 다시금 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욱 놀라운 건 세밀화의 절정이 이 그림에서 드러난다. 하나하나 살펴보기 전에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예수를 받치고 있는 수염이 난 자는 예수에게 선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니고데모”, 그리고 오른편으로 황금 옷을 입은 사람은 무덤을 내준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그 옆에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오른편에 두 사람을 소개하지 않았는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손에 박혀 있던 못을 들고 있는 사람과 막달라 마리아 옆에서 흰 항아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시종들이다. 왼편으로는 라피스 라줄리의 푸른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성모 마리아 그리고 붉은색 옷을 입고 등장하는 사도 요한(가끔 10% 정도 흰색과 파란색을 입고 나올 때도 있어서 혼란을 주기는 하지만, 십자가 옆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면 90% 사도 요한이라고 설명해도 틀리지는 않는다)이다. 그리고 그 위 흰 두건을 쓴 여인은 사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그리고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은 유대 감독 글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이다.


    이제 자세히 좀 살펴보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탈리아에서 표현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고난의 예수를 사실적으로 나타낸 장면입니다. 고통의 한계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이마에 저리도 깊은 주름이 파였을까? 그리고 아무리 죽은 자라지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자처럼 탈진 그 이상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고 손과 허리 그리고 발에서 흘러내리는 핏자국들이 상황을 말해준다. 그런데 죽은 예수와 성모의 모습은 너무나 똑같은 대칭의 구조이다. 활 모양의 팔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준다.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닿을 듯 말 듯한 아들과 어머니의 손이다.


    성모 마리아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듯하다. 표현이 심하다 싶겠지만, 성모 마리아의 얼굴색을 보라. 아들이 죽었는데, 그 어떤 부모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핏빛이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 두 눈은 온전히 감기지 않았다. 흰자만이 드러난 상태로 “혼절했다.”라는 우리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다. 그 옆에서 쓰러진 성모를 붙잡고 있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갑작스레 쓰러진 성모를 잡기 위해 몸을 굽히지만(웨이덴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망토의 우리가 보는 왼쪽 옷이 바람에 날리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그 두 눈가에 붉게 드리워진 홍조로 인해 마음의 애잔함이 더 강하게 밀려온다. 자세히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프라도 미술관이 좋은 이유는 그림을 소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이다. 개인이 소장하는 한도 내에서 무료로 원화를 내려받아 보도록 배려했다. 재생산과 활용(프라도 미술관에 정확한 규정이 있다)은 저작권 신고를 해야 한다. 내려받아 눈 부분을 확대해보자. 만일 지금 미술관이라면 앞에 선을 넘지 말고 그림을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서 보자. 그러면 눈시울이 붉은 것이 아니라,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중이다. 사도 요한의 머리 위에서 울고 있는 흰 두건을 쓴 어머니가 있다.


    사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이다. 물론 머리의 두건은 당시 플랑드르의 풍습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저 얼굴의 표정 속에서 더욱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왜 그러냐 하면, 눈가에 흐르는 눈물 때문이 아니다. 살로메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자세히 보면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눈의 겉이 아닌 하도 울어서 눈 속의 살이 밖으로 돌출이 된 것이다. 얼마나 처절한 아픔의 고통을 겪었으면 저리 눈이 뒤집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그러했을까? 그 살로메 옆에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은 하염없이 안타까움에 내려다보는 듯하다.


    유대 감독 글레오파스의 아내 마리아이다. 이 여인 역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부 볼을 적시며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웨이덴은 세밀화의 정점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초록색 밑에 회색 계열의 양모가 모이는가? 아무리 확대해도 붓 자국이 드러나 보이지를 않는다. 마치 바늘로 그린 것처럼 말이다. 이런 세밀화의 극치가 그림을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고 체감하도록 만들어 준다. 이런 모습은 그 옆에 있는 예수를 안고 있는 니고데모에서도 보인다.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가장 선한 자라고 칭찬을 받은 자로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 특히 예수의 허리 창 자국 아래 검은 옷단을 보자. 검은 옷단 끝 황금색의 모습을 보면 넓은 붓으로 터치를 하였다기보다는 한 줄 한 줄, 마치 실제의 털을 심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이 니고데모의 머리 위에는 한 명의 시종이 있다. 이 시종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끓어 내린 장본인 일 듯하다. 자신의 왼손으로 예수의 팔을 잡고 있지만, 이 사람이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십자가에 박혀 있던 예수의 손에서 못을 빼낸 것이다. 그 못을 손에 들고 있는데, 그 굵기와 길이가 정말로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황금 옷을 입은 사람은 예수를 위해 자신이 죽으면 묻히려고 준비해 둔 무덤을 내어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족이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본인이 처음 사용하려던 무덤을 내어 준 것이다. 이 사람의 두 눈가에 역시 흐르는 눈물과 입가까지 흘러내린 눈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물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은 등장인물들 모두에게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왜 고개를 숙였을까? 손의 반지는 어떤 의미일까? 반지는 언약, 약속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그림에 등장을 많이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것은 자신의 꿈에 대한 허탈함 때문일 수도 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자기 삶의 변화를 이루었지만, 그 사람이 죽자 모든 것이 동반 상실되어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바라보던 것은 과거 자신이 모두에게 돌을 맞고 있을 때 그 앞에 서서 일어나라 했던 바로 예수의 발이었다. 죽음의 공포 안에서 희망을 주며 처음 만났을 때 먼지에 덮인 발을 보았을 텐데, 이제 그 발이 피로 적셔져 있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인물을 실제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의 실제적인 크기로 그려냄으로 인해 사람들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성공을 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균형과 원근법 등 다양함을 어떻게 조절할까? 고민한 부분은 성모 마리아의 옷으로 가려진 십자가 하부와 십자가 뒤로 사다리 타고 올라가 있는 시종의 모습을 통해 적절하게 표현되었다. 플랑드르 세밀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웨이덴의 이 그림이다.


하이로jairo의 출판을 하려다가 공개하는 개인 저작글이니 퍼가시거나 인용시 출처를 반드시 밝려 주시고 아래 댓글에 꼭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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