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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Apr 25. 2022

초상화의 기본으로 불릴 정도로 섬세함과 그 놀라움

홀바인의 진수가 느껴지는 헨리 8세의 삶의 굴곡

6.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el Joven. Retrato de Enrique VIII de Inglaterra. 영국의 헨리 8세의 초상화. 1537]

 

    영국에서는 16세기에 초상화가 전형적인 회화 장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특히, 이 그림의 주인공 헨리 8세는 자신의 업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었고 이 그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아마도 기품있는 얼굴과 품위 있는 의상 그리고 두 손을 올려 그리며 자신이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의 부와 명성을 자랑하고 싶었던 헨리 8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라피스 라줄리”이다. 아프카니스탄이 원산지인 이 준보석은 화려한 색상을 내지만 워낙 구하기 힘든 재료라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헨리 8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픈 마음에 자신의 모습을 제외한 모든 배경에 이 라피스 라줄리를 사용한 것이다.


    헨리 8세는 영화에 전설적인 바람둥이로 등장을 한다. 물론 절대 군주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가정사 부분에서는 많이 아쉬운 부분이 작용을 한다. 헨리 8세의 초상화 바로 오른쪽에 있는 플란데스가 그린 소녀의 초상화는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불린다. 언뜻 보면, 동양의 아이처럼 보이지만 명실공히 스페인 왕실의 첫 공주였다.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의 공화국 시스템이었던 스페인이 이세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을 중심으로 뭉쳐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7층탑의 문 위에서 나시리 왕조의 마지막 아랍 왕 보압딜이 무릎을 꿇음으로 스페인이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왕조의 첫 공주가 바로 아라곤의 캐서린이다. 하지만 영국의 헨리 8세에게 시집을 간 이후 헨리 8세의 바람기로 인해 결국 이혼을 당하게 된다. 물론 당시 교황청의 승인(당시 교황은 클레멘트 7세)을 얻어야 했으나 아라곤의 캐서린은 당시 전 유럽을 흔들었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제 카를로스 5세의 이모였다. 그러니 교황청은 당연히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헨리 8세는 이혼을 교황청의 승인을 얻으려 한 것일까? 당시 유럽은 가톨릭 문화로 형성된 국가로 왕정의 이혼과 결혼은 교황청의 승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교황청은 승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화가 난 헨리 8세는 자신 스스로가 영국 성공회의 수장이 되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이로서 교황청(교황청에서는 파문으로 결론을 내림)과는 멀어지게 된다. 이후 앤 블린, 등 총 6명의 여인과 결혼과 이혼을 반복을 한다. 물론 모함으로 죽이기도 한다.


    아무튼 당시 북유럽은 세밀화 기법으로 인해 초상화가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한스 홀바인은 영국으로 건너가 헨리 8세의 초상화 등 많은 작품을 그리면서 입지를 굳히게 된다. 특히 한스 홀바인이 그린 이 헨리 8세의 초상화는 초상화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 때문일까? 영국의 회화 기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헨리 8세의 초상화는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 초상화의 개념보다는 얼굴을 중심으로 한 왕으로서 내면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왕의 시선이 대상자를 바라보지 않고 마치 방관하듯 하는 나와는 뭔가 다른 듯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프라도 미술관 1층 벨라스케스의 방 앞에 전시되어 있는 티치아노의 카를로스 5세 기마상이 뮐베르크 전투의 잔인함은 감추고 믿음직하고 선한 왕의 이미지로 그림이 묘사된 것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은 헨리 8세의 굳은 의지와 함께 그 내면의 강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자와 목걸이로 자신의 부와 명성을 자랑하며 아울러 입고 있는 “튜더 왕조의 레미기우스 렘프트(Remigius Leemput)” 스타일의 풍성한 의상으로 군주로서의 계승의 면모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래서 초상화를 그릴 때, 선과 시선처리가 바로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초상화가 군주를 그려낸 것 중에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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