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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Apr 25. 2022

블러드메리의 엄마 아라곤의 캐서린 어릴적 모습

헨리 8세 사진 옆에 나란히 걸려 있다

7. 후안  플란데스[Juan de Flandes. Retrato de una infanta. Catalina de Aragón (?). 유아의 초상화. 아라곤의 캐서린(?). 1496]

 

    플랑드르 출신의 후안 데 플란데스가 스페인에 들어오게 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세벨 여왕의 곁에서 그림 활동을 하며 독특한 스페인식 플랑드르의 회화기법을 페드로 베루게테와 함께 완성을 했다. 아마도 당시 스페인은 양을 키웠지만, 그것으로 양탄자 등 여러가지를 만들 기술력은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결국 북유럽의 문화 기술을 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플랑드르의 화가 및 예술가들은 문화를 활성화시켜 나가고 있는 스페인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1496년이라는 년도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아라곤의 캐서린이 11살 되던 때의 모습이다. 이세벨 여왕 당시 플란데스는 스페인 자체적인 회화 기법을 구사를 하면서 플랑드르의 다양한 회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아직도 이 그림을 아라곤의 캐서린이라고 하기보다는 “소녀의 초상화”로 부르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이 아라곤의 캐서린이 된 이유는 비엔나의 쿤시토리스 박물관에서 미치엘시토우의 초상화(retrato de mano de Michiel Sittow, en el Kunsthistorisches Museum de Viena )에서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손에 들고 있는 장미는 펠리페 2세의 부인이었던 메리 튜더(프라도 미술관 0층에 초상화가 있다)의 초상화에서 보듯 동일한 튜더 왕조의 장미가 보인다. 아서 튜더와 결혼을 했지만, 아서 튜더가 죽고 헨리 8세와 약혼만 한 상태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어려운 시간을 보넀다. 그러나 왕비가 된 이후, 헨리 8세는 앤 블린과의 결혼을 꿈꾸며 아라곤의 캐서린을 쫓아낸다. 하지만, 아라곤의 캐서린의 왕녀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혼 후에도 늘 “왕비 카탈리나”라는 서명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린 소녀의 타국에서의 아픔은 결국 자신의 딸 매리 튜더에게서도 그대로 보인다. 캐서린의 초상화와 메리 튜더의 초상화를 보면 엄마와 딸의 지나온 세월에 대한 삶의 다양한 면모가 얼굴을 통해 보인다. 굳게 다문 입은 특히 왕실의 고난을 드러내지 않은 왕실의 깊은 참을성의 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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