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미술관 예술기행
6. 반 데르 웨이든이 말하는 플랑드르 미술의 진실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바꾸려하거나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다.
이탈리아 시에나나 피렌체는 솔직히 너무 쉽다. 왜냐하면, 알프스 북부에서 시작한 “who am i”가 이들의 미래를 바꾸었다.
시선의 변화, 관점의 전환이 바로 르네상스이다. 신이 바라보는 인간을 그려낸 이콘화가 아닌, 인간이 생각하는 신과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물음이 기름을 끼얹은 것이 르네상스이고, 이 르네상스에 아무도 관심없이 신의 관점이라며 무차별 폭력을 합리화하던 종교에 내면의 감성을 호소했던 것이 바로 플랑드르이다.
과거 바이킹의 후예이기에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문화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솔직하게 고백하자! 있는 그대로 보여 주자! 이런 모토였다. 꾸미거나 치장하는 까마귀가 아닌 내면의 울림을 그대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생겼다. 너무 사실적기에 수용할 인간의 그릇은 아직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베네치아의 르네상스 후기는 색상의 화려함 속에 인간의 내면적 갈등은 별개가 되어 버렸다.
이것을 예견이라도 하듯, 로베르트 캉팽과 얀 반 에이크의 미술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 반 데르 웨이든의 그림을 프라도나 티센이나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서 보노라면, 그리고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의 그림까지 … 말이다.
한결같이 느끼는 건, 색채를 넘어 인간의 고통의 한계를 사실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나리자를 웨이든의 그림보다 소장하고 싶은 이유는 섬세함 때문이다. 웨이든의 그림은 바라보면 볼수록 사람의 내면이 보이고 각자의 감성적 울부짖음이 들려 매일 바라본다면 정신적 이상이 올 것 같지만, 모나리자에게서는 이런 느낌이 솔직히 전혀 들지 않는다. 사람을 끌어 드리는 힘이 다르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는 보여주기 바쁘다. 하지만, 웨이든은 느끼라고 보면서 느끼라고 소리 지르고 있음을 본다.
이것이 웨이든의 미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