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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by 그림크림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 티라노 씨는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말도 못 걸게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딱 하나 다니는 수학학원마저 때려치우겠다고 난리까지 치니 미칠 노릇입니다. 바람 앞 촛불처럼, 너무 위태위태해 보입니다. 이러다 학교 안 다니겠다고 할까 봐 겁이 날 정도입니다. 공부 안 해도 되니까 제발 학교는 잘 다녔으면 좋겠다 간절히 빕니다.


입학한 고등학교 등교시간이 한 시간이나 당겨져 걱정했는데, 다행히 전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줍니다. 학원 그만두겠다는 소리도 없어졌고요. 학교에 제시간에 가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문제는 급식입니다. 입학 첫날 먹곤 그 뒤론 한 번을 안 먹습니다. 갑자기 왜 이러나 걱정이 됩니다. 급식실에 오가며 함께 먹고 나오는 과정에서 더 친해지기에 급식은 중요합니다. 아이가 학교에 잘 다니고 있나 체크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급식을 잘 먹느냐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이 시작됩니다.


ADHD 약 때문에 오후 3시까지는 식욕이 전혀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혹시 급식실에 혼자 이동하기 싫어서 안 가는 건 아닌지, 먹기 싫어도 눈치껏 따라다니지 그러다 또 친구 못 사귀면 어쩌나 걱정과 원망이 교차합니다.


기분이 좋아 보일 때를 틈타 슬쩍 묻습니다. 급식실이 너무 멀어, 오르락내리락 정말 힘들답니다. 게다가 줄도 중학교 때보다 오랫동안 서야 한답니다. 입맛도 없는데 매일 점심시간을 날릴 수는 없답니다. 얘기를 들으니 수긍이 돼 아무 말도 못 합니다.


결국 아이가 저혈당으로 기분 폭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삼각김밥이나 조그만 빵을 싸주기 시작합니다. '급식이 나오는데, 매일 도시락을 왜 싸야 하는 거야!' 두더지 게임처럼, 올라오는 의문을 눌러 없앱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 신청도 안 했는데 담임 선생님께 연락이 옵니다.

'무슨 일 있나?' 심장이 두근두근 나대기 시작합니다. '올해도 티라노 ADHD인 거 눈치채셨나 보네!' 통화해 보니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일대 일 상담인데도 선생님 말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답이 늦거나 머뭇거렸다는 겁니다. ADHD 약물치료를 꾸준히 한지 2년이 넘었기에 이번엔 안 들킬 줄 알았던 건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사실은 티라노 씨가 ADHD에요. 그리고 전 중학교 교사고요. 근데도 아이가 ADHD에 사춘기라 제 뜻대로 안 되고 쉽지 않습니다." 전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알고 계신 게 확실합니다. 게다가 제가 과학교사인 것도 이미 들었답니다.


"지각을 자주 해요. 지각한 날은 핑계를 대며 교실에 들어오는데 핑곗거리가 참 다양해요. ㅎㅎ 어머님 말씀과 달리 쾌활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요! 수학 정말 잘하긴 하나 봐요! 친구들이 티라노에게 모르는 수학문제를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단지 ADHD 맞는지 확인하려고 전화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고등학생이니 이젠 정말로 스스로 챙겨야 하는데 우리 티라노 큰일 났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 담임이신데도 밴드에 가정통신문이나 공지사항을 빠짐없이 올려주십니다. 남자 선생님인데도 지금껏 겪은 선생님 중 가장 섬세하십니다. 느리고 깜박하는 아이를 두었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남고인 데다 정시 준비형 학교라 티라노 같은 덜렁이들이 많은가 봅니다. 공부와 성적을 떠나서 이 학교에 보내길 참 잘했다 싶습니다.



티라노에게 중1 때부터 지금까지 학교생활이 5점 만점에 몇 점인지 평가해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ADHD 진단을 받았던 중1 때는 3점, 친하던 친구 둘을 연결시켜 주곤 혼자 소외되었던 중2 때는 1점, 친구를 사귀려는 시도 자체를 안 하고 조용히 지낸 중3은 2.5점. 그리고 올해는 4점이랍니다. '정말 다행이다.' 여러 가지 마음이 떠올라 뭉클한 무언가를 만들어냅니다.


"학교에서 재밌는 일 뭐 없었어?" 어느 날은 에피소드를 물었습니다. 친구와 학교 성경을 찢어 종이비행기를 날렸답니다. '하. 어쩐지, 쪼개져 있더라.' 싶습니다. 그 친구랑 어떻게 친해졌는지 물었습니다. "걔가 가끔 급식을 안 먹는데, 나랑 같은 게임하고 있더라? 내가 먼저 같이 하자고 말해서 같이 했어. 근데 이번 달에 내 앞자리가 돼서 좀 친해졌어!"랍니다.


"오~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정말 잘했다!" 작년과 달리 자신감이 생긴 모습을 보니 대견합니다.

"그래서 성경책도 같이 찢으며 놀았구나?" 비아냥 한 스푼을 담아 농담도 던집니다.


체육시간에 있었던 두 번째 에피소드도 말해줍니다. 인문계고라 그런지 체육시간에 자유시간이 많답니다. 작년엔 티라노처럼 운동 싫어하는 아이가 별로 없어서 자유 시간마다 외로워했습니다. 올해는 체육시간 수다 멤버가 6명이나 있답니다. 한 번은 6명이서 본관 지하실 탐험을 다녔답니다. "오락실 펌프랑 헬스기구랑 별의 별게 다 있어! 지하실 진짜 재밌어!" 신났습니다.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이 있는 반에 걸려 정말로 다행입니다.


"너한테 친구들이 수학 많이 물어본다며?" 치켜세워 주려고 물어봅니다. "한 명이 몇 번 물어봤는데 담임선생님이 그때 봤나 봐. 우리 반 반장인데, 나랑 같은 학원 다녀. 같은 레벨은 아니고."

'대신 걔는 다른 과목도 골고루 공부하겠지!' 속으로만 대답합니다. 반장처럼 인기 많은 아이가 물어봐준다고 해서 얼마나 안심인지 모릅니다.


아침 등굣길, 또 지각입니다. 중학교 때는 지각을 1분이라도 하면 벌점을 받아 지각을 거의 안 했습니다. 올해는 지각하면 교실청소로 때우면 되니 동기부여가 안되나 봅니다. 20분 동안 깨워도 잘 못 일어납니다. 지각 확정인 날 나가며 말합니다.

"오늘은 지각 뭐라고 핑계를 대고 들어가지?"

ADHD에게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정말로 버거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일찍 등교시키는 학교인데도 매일 웃으며 등교해 주어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체육대회날, 학부모 도우미가 필요하다기에 자원했습니다. 티라노의 학교생활과 교우관계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놓칠 순 없습니다. 신기한 게 반 아이들 전부 성향이 티라노와 비슷합니다. 체육대회인데도 응원은커녕 전부 가만히만 앉아있습니다. 도우미 엄마들끼리 웃으며 말합니다.

"전부 극 I만 모아놓았나 봐요! 다행이에요 정말."


점심시간, 다른 반 아이들은 대부분 의자 방향을 바꾸어, 친한 아이들끼리 빙 둘러앉아 먹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티라노 반 아이들만 전부 앞만 보며 얌전히 먹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무서운 분이 전혀 아닌데도 그러니 참 신기합니다.

"우리 애가 느리고 조용한 아이인데, 반 전체가 비슷하네요. 정말 반이 잘 걸려서 다행이에요."

반 엄마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어쩌다 반모임에 가면 '저 엄마가 티라노 엄마야?'라는 특유의 표정이 있었습니다. 눈총 받으니 위축되어 제대로 친한 엄마 한 명 만들어보지를 못한 채 고등맘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보면 아이랑 똑같아!' 교사들 사이에선 국룰로 통합니다. 티라노 반 엄마들을 보니 그 말이 맞다 싶습니다. 저에게도 호의적으로 대합니다.


반 아이들도, 엄마들도 모두 순둥순둥, 전부 ADHD는 아닐 텐데 저처럼 해맑고 순수해 참 편안합니다. 아무도 절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지 않아 신기합니다. 기분 좋은 낯섦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 말은 운이 70%나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능력 30%를 갖추고 준비하다 보면 운이 내게 닿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노력하며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하늘의 운이 내게 닿았을 때 잡을 수 있습니다.


하도 울며 노력했더니 눈물이 바닥에 쌓여 석순처럼 자라나 하늘에 제 노력이 닿은 게 분명합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이 느린 아이, 어쩜 담임선생님까지 전부 극 I인 데다 느긋하고 순한 아이들만 있는 반에 배정된 걸 보면 말입니다. 반 전체가 티라노 씨로 가득합니다. 덕분에 티라노는 학교에서 웃음을 조금은 되찾았습니다. '꿈이냐 생시냐' 죽으란 법은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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