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등하교하던 티라노 씨, 자전거가 망가져서 걸어갔다 오게 되었습니다.
종례 후 전화가 옵니다. 아침에 늦어서 뛰어가다 넘어져 발목을 삐었는데, 턱이 있는 줄 몰랐답니다. 놀란 저는 “괜찮아? 차로 데리러 갈까? 아니면 택시 타고 올래?” 묻습니다. “그 정도 절대 아니야. 걸어갈 수 있어.”라며 30분 거리를 걸어옵니다.
혹시 몰라 정형외과에 갔습니다. 그 정도 아닌데 호들갑 떤다더니, 발목 인대 2개가 완전히 끊어졌답니다. 그렇게 깁스하고 집에 왔습니다.
얼마 전 발가락 골절로 깁스를 해본 저는 걱정이 됩니다. 깁스 생활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잘 땐 더 하고요.
“우리 집에 반깁스 2개가 됐네!”
엄마에 이어 깁스하게 된 저희 모자를 남편이 놀립니다.
“입학 후 처음으로 걸어갔는데 실화냐?! 다칠까 봐 무서워서 어디 걸어 다니겠냐?”
제가 봐도 상황이 어이없어 그저 웃습니다.
“깁스 끼고 자면 매우 불편할 거야. 엄마도 정말 힘들었거든! 불편해도 4주간 꾹 참고 껴야 해. 잘못하면 수술할 수도 있대.”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지켜야 할 행동 방향을 논리적으로 알려줍니다.
인대파열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등하교를 시켜주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없고, 버스는 갈아타고 가야 해 오래 걸리거든요. 안 그래도 덜렁이가 깁스를 하고 만원 버스에 서서 가다가 악화될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요.
'위기는 기회랬어!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등교는 남편이 출근길에, 하교와 학원 픽업은 제가 시켜주기 시작합니다. 근육과 뼈에 좋은 영양제도 매일 챙겨줍니다. 엄마 아빠의 정성에 감동했나 봅니다.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갑자기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못 걸게 하던 아이가, 말하는 횟수가 조금씩 늘어납니다.
깁스를 하게 된 이후에도 배고프면 가서 먹겠지 싶어서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굶던 어느 날, 자기 전 나지막이 말합니다. "엄마, 우리 반 서준이가 엄청나게 큰 주먹밥을 싸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였어." 왠지 서글프게 들리는 건 제 착각일까요.
그렇게 전 팔자에도 없는 점심 도시락도 싸주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도 ADHD 약 때문에 입맛이 없어 급식을 먹기 싫어했던 아이가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을 깁스를 한 채 오르내려가며 급식을 먹을 리가 없다 싶었거든요.
다음 날 아침, 큰맘 먹고 참치마요 왕주먹밥을 싸주었습니다. 고등학생 아저씨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합니다.
'급식이 나오는데 왜 도시락을 싸야 하니...' 자꾸 현타가 옵니다. "다리 다친 기간만이야! 깁스 푸르면 알아서 급식 먹어야 해!" 티라노에게 신신당부했더니, 계속 싸주면 안 되냐고 합니다.
곤란한 전 다시 말합니다. "만약 급식표 보고, 내일은 도저히 못 먹겠다 싶은 날만 싸줄게!"라고요. "매일 못 먹을 급식일 것 같은데?"라며 능글능글 웃습니다. 어이없지만 귀여운 반응에 저도 덩달아 웃게 됩니다.
한 달 내내 투정 한 번을 안 합니다.
잘 때조차 불편하다, 빼고 있고 싶다 투정 한번 안 했거든요. 깁스를 낀 내내 "힘들다, 불편하다, 아직도 걸을 때마다 아프다, 운동 못 해서 속상하다"며 투덜거린 제 모습과 비교가 되어 무안해집니다. 깁스를 푼 후에도 1년 가까이 통증이 있어 계속 하소연했기에 엄마로서 더 부끄러워집니다.
4주 후 초음파를 다시 찍었더니 의사 선생님이 놀랍니다. “이렇게 잘 붙은 인대 오랜만에 보네요!” 제가 봐도 인대가 튼튼히 잘 붙었습니다. 4주간 단 한순간도 안 빼고 있었으니까요.
예민해서 짜증이 많으니, 참을성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인내력이 좋은 아이였어?’ 어른도 참기 힘든 깁스, 4주 동안 불편하다고 투정 한 번 안 했으니까요. 괜찮냐고 물으면 늘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는 골절이라 나보다 힘들었던 거지~ 난 인대라 그 정도는 아니야. 할만해! 안 불편해!"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배려할 줄도 알다니!'
감동받아 심쿵합니다. 2년 넘게 약을 꾸준히 먹였더니 전두엽이 조금 뚫리긴 했나 봅니다.
티라노야, 그거 알아? 더 이상 예전의 네가 아닌 거.
이제 세상에 나갈 준비가 된 것 같아. 학교에서도 집에서만큼만 하면 돼!
그리고 너 정말 주위를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거 알아? 요새 엄마는 주변 모든 사람들 중에서 네가 젤 재밌고 웃기더라! 엄마가 네 엄마라서 이렇게 말하는 게 절대로 아니야! 엄마가 억지로 웃어주는 게 아니라 정말로 네가 절묘한 타이밍에 맞게 웃기는 말을 잘하거든!
원래 남을 웃게 만드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야. 소리 내어 크게 웃으면 행복 호르몬들이 나와서 오랫동안 좋은 기분이 되게 해 주거든.
이런 아이가 되었습니다.
편식이 너무 심해 구운 고기만 퍼 먹였는데, 얼결에 벌크업이 되었는지 몸이 호리호리합니다. 엄마 글 검토해 줄 때마다 그렇게나 두렵다던 공부책상에 앉습니다. 몇 분씩 지각을 할 때도 있지만 지각 시간과 횟수가 줄었습니다.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가끔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해 줍니다. 2년 만에 해주는 반 친구들 이야기, 얼마나 뭉클한지 모릅니다.
그래도 여전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수학만 합니다. 다른 과목 등수는 처참합니다. 수학 전교등수와 다른 과목들의 뒤에서 센 전교등수가 비슷하거든요. 하하하. 시험이 다가와도 여전히 책상에 앉으려는 시도조차 안 합니다. 전국에 이런 아이가 또 있을까 정말 궁금할 정도입니다.
여전히 지각대장에, 미루기 대장입니다. 티라노 반 청소는 대부분 티라노 몫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감정조절도 어렵습니다. 여전히 예민하고 짜증과 화도 많습니다.
위기가 나비효과가 되어 새로운 기회를 불러왔습니다.
관계가 다시 좋아졌습니다. 말 걸지 못하게 하는 일이 점점 줄고 대화하거나 장난치는 일이 다시 늘었거든요. 아이의 강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참을성과 인내력이 이렇게나 좋은 줄 미처 몰랐거든요. 생각해 보니 마음을 잘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먹은 일에 있어선 과제집착력이 남다르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위기가 불러온 나비효과가 제 머릿속 긍정회로를 돌렸나 봅니다. 한번 티라노가 좋게 보이니, 이젠 별게 다 좋게 해석됩니다.
이제 묵묵히 되돌아오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방황의 끝에서 엄마가 어딨 나 찾다가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도록. 어디서 방황하든지 적당한 거리를 두며 곁에 있어주려 합니다.
(이미지출처 :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