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과학교사의 대학시절 이야기

by 그림크림쌤

대학 때 제 별명은 '스페셜리스트'였습니다. 삼총사였던 저희 셋이 특이하다며 선배들이 붙여준 별명이었지요. 놀랍게도 제가 넘버 1이 아니었습니다. 제 친구가 넘버 1이었고, 전 '넘버 2'였거든요. 극 I였던 가장 평범한 나머지 친구가 넘버 3였습니다. 선배들은 넘버 3 친구에게 "너 왜 얘네랑 다녀! 너도 그러니까 점점 스페셜해지잖아!"라며 농담을 던지곤 했습니다.


저는 깜짝깜짝 잘 놀랍니다. 대학생 때는 더했습니다. 그런데 제 넘버 1 친구는 저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 심장이 철렁하면 옆의 넘버 1 친구는 양팔을 들며 매우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곤 했거든요. 일부러가 아닌, 누가 봐도 저보다 더 많이 놀라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자주 넘어지고 부딪힙니다. 대학생 때 이것도 더했습니다. 이 점 역시 제 넘버 1 친구는 저보다 심했습니다. 하루는 점심 식사 후 수업을 듣기 위해 중앙현관을 통과하는데, 제 친구가 갑자기 옆 시야에 없는 겁니다. 보니까 투명한 유리문을 보지 못한 채 들어가려다 이마를 세게 부딪힌 겁니다. 어느 날 제 친구가 또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보니까 그냥 혼자 넘어진 겁니다. 전 이 정도는 아니었기에 제가 봐도 제 친구가 스페셜 넘버 1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물건도 자주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30대 언젠가부턴 거의 없어진 증상입니다. 대학 때 친구와 함께 에버랜드에 놀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카메라를 빌려 가지고 갔지요.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없는, 모토로라와 애니콜 시대였기에 휴대폰 사진 화질이 좋지 못하던 때입니다.


아무튼, 친구가 빌려온 카메라를 내내 친구가 들고 다니다가 제가 사진을 찍어준 후 제가 잠깐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화장실을 다녀왔지요. 갑자기 친구가 "어? 너 카메라는 어쨌어?"라고 묻습니다. 생각해 보니 화장실 벽에 카메라를 걸어둔 채 그냥 나온 것이었습니다. 다시 가보니 당연히 누가 가져갔고요.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CCTV가 발달하기 전이라 물건을 놔두면 가져가고, 도서관에서 노트북 분실이 빈번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식당이나 카페 테이블 위에 휴대폰을 놓고 나오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늘 친구들이 챙겨주곤 했습니다. 햄버거 세트를 들고 가다가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거나 평지에서 삐끗해 콜라를 쏟는 일도 흔했습니다. 덕분에 햄버거 집에 가면 친구들은 쟁반을 제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넘버 3 친구가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제게 그럽니다.

"넌 과학 쪽 지능은 평균 이상으로 매우 똑똑한데, 나머지 지능은 전부 다 평균보다 많이 낮은 것 같아."

맞는 말 같아서 "내 생각도 그래 ㅎㅎ"라고 웃어넘겼습니다. 근데 이 말이 나름 충격이었나 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말을 들은 장소와 친구 표정, 주변 분위기까지 사진을 찍어놓은 듯 생생히 기억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지나고 보니 제 친구가 저의 일반 지능과 전두엽 지능을 알아보았나 봅니다.


유독 넘버 1 친구를 안 좋게 보던 선배 언니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OO 이는 정말 바보인 건지, 아니면 바보인 척하는 천재인 건지 모르겠어. 어떨 때 보면 정말 바보 같아 보이는데, 어떨 때 보면 똑똑해서 일부러 그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이 말에 저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넘버 1 친구 별명이 '바보'였습니다. 물론 기분 나쁜 뉘앙스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넘버 1 친구는 돌이켜보면 정말 충동적이었습니다. 물리학과에 진학하려고 우리 학부에 입학했노라고 1년 내내 말하고 다녀놓고, 막판에 뜬금없이 지구과학과에 진학했거든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우리에게 친구는 말합니다. "ㅁㅁ이가 지구과학과가 더 좋다고 하길래!"랍니다. (훗날 이 둘은 결국 결혼했습니다.)


작년 초에 이 스페셜리스트 친구들을 만났을 때 저와 티라노의 ADHD를 커밍아웃했습니다. 그런데 제 넘버 1 친구가 화를 펄펄 내며 말합니다. "네가 무슨 ADHD야~ 말도 안 돼! 너 어디 이상한 데 가서 검사한 거 아냐?"랍니다. ADHD라고 용기 내어 고백한 제게 화를 내니 당시엔 기분이 나빠 정색하며 답했습니다. "S대 나온 소아정신과 전문의 병원에서 검사받았어.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더블보드고." 지나고 보니 친구가 화를 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셜 넘버 2인 네가 ADHD라고? 그럼 혹시 나도 ADHD인가?'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습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감성에 젖어 오랜 추억을 꺼내어 보았습니다.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을 떠올리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오늘도 전 이렇게 세로토닌을 충전하여 하루를 살아갑니다. 제 글을 읽는 독자님들도 저로 인해 조금이라도 세로토닌이 충전되었기를 소망해 봅니다.


keyword
이전 18화ADHD 고딩남아, 수학마저 쉬고 체스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