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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HD 고딩남아, 수학마저 쉬고 체스만 합니다.

by 그림크림쌤

ADHD 아이 부모의 내려놓음의 끝은 어디일까요? 사춘기까지 온 ADHD 남자아이의 내려놓음의 끝이 있기는 한 걸까요? 정말 성실하던 초등학교 6학년 티라노였습니다. 영어학원을 시작으로 학교시험공부까지 전부 내려놓아 수학만 겨우 살렸는데, 현재는 수학마저 쉬고 있습니다. 다음 주면 2학기 기말고사고, 곧 있으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될 아이가 말입니다.


지난 편에서도 썼듯, 공부는 전혀 안 한 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온종일 체스만 합니다. 혼자 AI와 하기도 하고, 저나 아빠와 번갈아 하기도 합니다. 컴퓨터로 체스를 너무 많이 해서 지치면 드러누워 스마트폰으로 체스를 두거나, 유튜브를 봅니다. 유튜브도 다른 건 보지 않습니다. 100여 년 전 체스 명경기나 최근 체스 선수들의 경기를 분석하는 영상만 주야장천 봅니다.


그런데 정말 희한합니다. 이 모습이 걱정스럽기는커녕 도리어 좋게 보이거든요. 누군가에겐 제 긍정이 '사춘기 ADHD 남아'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느라 미신적인 낙관을 발휘한다고 비추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아이의 체스 과몰입이 불러온 장점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체스에 빠지게 된 이후로 아이는 그전에 과몰입되어 있던 온라인 게임들을 거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친구들과 함께 수다 떨며 할 때만 종종 합니다. 물론 체스도 어찌 보면 게임이지만, 온라인 세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경기도 열리는 보드게임이니까요. 아이가 게임 세상에서 벗어날 이 순간을 몇 년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도 직접 해보니, 체스의 ADHD 인지행동치료 효과가 상당합니다. ADHD 특유의 터널시야로 인해 상대에게 먹힐 곳으로 말을 옮기는 일도 체스를 두면 둘수록 줄어듭니다. 먹히지 않기 위해 여러 방향을 전부 고려하는 과정에서 시야를 더 넓게 보게 되더라고요. 깊게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 충동적으로 대충 두면 안 좋다는 것도 점차 학습됩니다. 그래서 체스를 하면 할수록 다음뿐 아니라 앞의 몇 수까지 예측하며 신중하게 두게 변합니다. 이 모든 체스를 둘 때 필요한 고차원적 사고능력들을 관장하는 건 다름 아닌 전전두엽이고요. 그러니까 티라노는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자체적으로 하루 종일 체스를 통해 ADHD 인지행동치료를 하고 있는 겁니다.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구나. 하늘은 내게 숨 쉴 틈을 한 번에 하나씩만 겨우 허락하나 보다. 수학이 가니, 체스가 왔구나!'라며 안도하던 어느 날, 남편이 덜컥 체스학원에 등록했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아이 문제 개선을 위해 처음으로 발 벗고 나선, 남편의 낯선 모습에 뭉클한 무언가가 올라옵니다.


티라노가 체스를 하게 된 후, 엄마인 제가 끼어들기 어려운 '두 남자만의 끈끈한 무언가'가 생겼습니다. 티라노는 아빠 퇴근을 목 빠지게 기다립니다. 특히 화요일과 수요일 퇴근을 가장 기다립니다. 체스학원에 가는 날이거든요. 사실은 아빠 손에 들려 있을, 체스학원 숙제를 기다리는 겁니다. 아빠가 선생님께 체스 숙제를 받아오면 티라노는 즉시 낚아채 테이블에 앉아 숙제를 미친 듯 풉니다. 어떤 날은 아빠와 나란히 앉아 퀴즈를 풉니다. 아빠는 안 풀리는 문제가 나오면 모범정답인 티라노 풀이를 훔쳐보기도 합니다.


학원까지 다니는 아빠는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티라노를 이기지 못합니다. 모든 경기를 분석받으려고 본인 용돈으로 월정액 결제까지 한 티라노를 아빠가 어찌 이길 수 있을까요. 영어와 수학에서는 그렇게나 질색하던 오답노트를 체스에선 어찌나 자발적으로 열심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두었어야 했는지, 이 수는 왜 블런더(치명적인 대실수)인지를 모든 경기마다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모의고사 영어는 한 줄로 찍고 자면서, 영어로 된 체스 경기 분석 자막은 그렇게나 열심히 읽습니다.


이 아이는 쉬기로 한 12월 말에 정말로 다시 학원에 돌아가게 될까요? 희한하게, 정말로 돌아갈 것 같다는 강한 믿음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 잡혔습니다. 심지어 '이제는 집에서도 숙제라는 걸 다시 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작지만 큰 소망도 고개를 자꾸만 듭니다. (덧: 11화 중3 1학기 기말, 갑자기 시험공부 거부 선언을 했다.)



저는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수학만큼은 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란 것을요. 학군지 이 동네에 온 후, 6년 반 동안 너무 치열하게 달려서 잠시 쉼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거든요.


그렇지만 만의 하나, 수학마저 정말로 놓는다고 해도 불안해하지 않을 겁니다. 이 정도 과제집착력과 과몰입이면 그 무얼 해도 다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의 뿌리가 마르거나 썩지 않도록 적당한 양의 물을 주고, 햇볕을 쪼여주며 기다릴 겁니다. 믿는 만큼 자라나는, 나로 인해 이렇게나 이상한 능력을 가진 ADHD로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조건 해낼 겁니다. ADHD 선배로서 티라노에게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줄 겁니다. "ADHD의 과몰입 정말 부럽다. 우리 애도 ADHD였으면 좋겠다."라는,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울려 퍼질 그날을 향해 천천히 나아갈 겁니다.



쉼 없이 뛰는 돌 지난 아기가 윗집으로 이사 왔습니다. 아기를 제지할 의사도, 매트를 깔 마음도, 사과도 전혀 없는 당당한 윗집의 층간소음을 피해 카페에 글을 쓰러 왔습니다. (너무 힘이 듭니다. 윗집 전세 만기 남은 1년 반 어찌 참나요?ㅠㅠ)


늘 글을 쓰던 거실의 적막한 제 공간이 아니라 그런 걸까요? 유독 글이 잘 안 써져서 몇 시간 애먹고 겨우 썼는데, 지금 보니 지난 편이랑 내용이 좀 겹치네요...(이놈의 부주의! ADHD! 하....ㅎㅎ)


다 써놔서 지우기도 뭣해 그냥 올립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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