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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자 Oct 22. 2019

낯선이 와 걸었던 어색함에 대하여

한강에서 마주 보고 걷는 기분이란...

한강의 바람이 차가웠다. 느리게 걷는 탓에 찬 기운이 더욱 느껴져 나는 자꾸 옷깃을 여미었다. 나는 지금 반포 한강 공원을 걷고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한남 대교가 눈앞에 보인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람 타고 흐느적거리다 내 이마에 몇 차례 떨어졌다. '우산을 펼쳐야 하나?'  고민을 하다 미세먼지를 머금은 빗방울이려니 싶어서 귀찮지만 배낭에서 우산을 꺼내었다.

날씨가 꾸물거려서인지 한강 공원은 어느 때보다 조용했다. 내 왼쪽으로 흐르는 한강의 물빛은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면 위에서 반짝거렸고 그 위로 이름 모를 작은 물새가 열심히 물속으로 고개를 쳐 박은 채 자맥질 중이었다. 순간 물 위에서 사라져 한 참 동안 잠수하다 물 밖으로 나온 새의 주둥이에는 작은 물고기가 물려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번 자맥질할 때마다 먹이 사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작은 새의 먹이 사냥을 응원하면서 한남 대교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내 오른쪽으로는 올림픽대로 위의 차 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정체되고 있었다. 차 소리만 아니면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 소리, 가끔씩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박새 소리만 내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체된 차들의 경적소리와 멀리서 ‘삐오 삐오’하고 울리는 엠블런스 차량의 소음은 자연이 주는 소리보다 훨씬 강하게 들려왔다.

마치 그 소음은 이 곳이 도시임을 일깨워주는 자각의 소리 같았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나오는 존재의 소리처럼, 자연의 소리에 마구잡이로 텃세 부리는 주인 마냥 끼어들었다.

소리의 전쟁.
그렇지만 큰 문제는 없다. 내 귀에는 이런 소리들을 막아주는 이어폰이라는 작은 도구가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오롯이 나와 음악에만 집중하게 해주는 무시무시한 소리의 데시벨로 나와 공간, 그리고 소리의 삼각관계만 만들어 준다. 비록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도 사라지고 소리와 공간만 남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말이다.

사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음악 소리와 자연이 주는 하모니 가운데서 걷다 보면 순간이지만 행복감과 자유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금쪽같은 감정들이 곧 얼마 안 가서 깨지기 시작할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음악에 점령당한 채 즐겼던 나만의 평화가 아주 서서히 슬금슬금 깨지기 시작한 것은 한남대교 밑을 막 통과한 후였다.

한남 대교 밑을 통과하면서 나는 내 앞 전방 20m에 걸어가는 약간 통통한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강을 따라 걷는 산책길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걷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여자가 갑자기 뒤로 돌아 뒤로 걸으면서 시작되었다. 나와 마주하게 되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상황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자가 뒤로 걸으면서 생긴 쳐진 속도 탓에 우리 거리는 좁혀져 13m 정도가 되었다. 조금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나는 내 속도를 갑자기 높여서 그 여자를 지나치는 것도 내 산책의 페이스를 깨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계속 앞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와 마주하고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찰나,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생각했던 여자가 아니었다. 조금 통통한 체격에 키가 작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내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시선은 더욱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부담스러움으로 인해 내 귀를 채워주던 음악 소리도 먼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편안함을 가장하느니 빨리 그 불편함을 모면하는 게 나을 듯싶어서 그 남자를 제칠 요령으로 더 빨리 걸었다.

13m, 12m, 11m... 조금만 빨리 걸어 그 남자를 제치면 한산한 공원에 나 홀로 다시 나만의 평화와 모든 풍경을 차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최대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9m, 8m로 가까워져야 할 남자는 점점 더 멀어지면서 다시 대략 13m 정도의 간격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마치 우리 사이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유지되는 마냥...

상황은 이랬다.
내가 속도를 내기 위해 팔을 휘젓어 속력을 낼라치면 그 남자는 더욱 팔을 휘둘러 걷는 속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마치 절대로 나를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서, 뒤로 걷는 자의 위상을 보여주려는 듯 내 앞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빨리 걸어서 그 남자를 제치려던 나의 계획은 간격 13m 앞에서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내가 천천히 걸어도, 빨리 걸어도 우리의 간격이 13m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게임에서 그를 이길 수가 없으며 이 게임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시선은 정면을 회피한 채 왼쪽의 한강이나 내 발밑으로 배회하게 되었다. 왔던 길을 돌아서 오면 그만이었지만 오늘 산책은 영동대교 밑까지를 목표로 둔 것이라 중간에 마주한 남자로 인해 포기하기가 싫었다.

다행히 영동대교가 앞에 보이기 시작했고 그와의 불편한 마주 걷기도 끝나가고 있었다. 회귀점이 되는 영동대교 다리 밑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몸을 홱 돌려서 왔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내 시야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벗어나자 날개 단 듯 너무도 자유롭고 편할 수가 없었다. 빼앗긴 자유를 다시 얻은 심정이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어느 다리에서부터 어느 다리까지는 뒤로 걸으리라 마음을 먹고 산책을 나왔을게다. 하필 뒤로 걷기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내 존재를 피할 길이 없을을테고 불편했기는 마찬가지 일터. 그렇다고 나로 인해 맘먹은 계획을 수정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내 고집대로 계획을 수정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도 서로의 충돌을 피할 13m의 거리는 확보한 셈이니 그로서도 나도 서로의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암튼 그 간격은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이자 서로에 대한 거리두기 매너로 느껴지기도 했다.

혼자 한강 공원을 차지할 수는 없을터.
반포 시민공원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되찾은 자유의 기쁨이 더욱 달콤했던 것은  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잘 참아냈음이 아닐까 싶다. 살다 보면 때로는 타인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그의 공간에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인내심도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나는 왜 달려서라도 그를 추월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나를 추월시키지 않으려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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