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가 쓴 걸작 소설인 『웃음과 망각』을 읽다 보면 '리토스트(Litost)'란 말이 나온다. 체코 말인데 우리나라 말인 '정(情)'처럼 다른 나라 말로 정확히 번역되기 힘든 고유의 뜻을 지닌 언어이다.
리토스트는 후회, 비탄, 동정, 그리움 등이 뭉뚱그려진 감정이라고 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 리토스트 감정은 우리 자신이 비참한 자아를 갑자기 꿰뚫어 봄으로써 생기는 고뇌의 상태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살다 보면 이런 달갑지 않은 리토스트와 같은 감정과 맞닥일때가 있기 마련이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자신의 초라함이나 비참함에 정면으로 노출되었을 때 우리는 그 감정을 제공한 사람이나 상황을 원망하거나 복수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아무튼 힘든 감정임에는 틀림없다.
다행히도 이 리토스트는 치료제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온갖 결함이라는 결함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일까? 역사상 사랑은 비참함을 덮어주는 마법의 치료제였었다. 지극히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사랑받는 사람은 이런 비참함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리토스트에 빠트리는 것도 또한 사랑이다. 사랑의 시련을 인간 고뇌의 원천이자 비참함의 바이블로 묘사하는 온갖 문학 속 표현들만 봐도 그렇다. 사랑의 시련은 헤어 나오기 힘든 리토스트 상태에 머물게 한다.
비참함을 유발하는 것도 사랑이요, 그것을 치유해주는 것도 사랑이라니, 어찌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혹자는 비참한 자아를 만드는 리토스트를 많이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거나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다. 많은 경험이 자기 자신의 비참한 자아의 통찰을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젊어서 미숙한 사랑을 많이 해보고 리토스트도 많이 느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테면 리토스트는 청춘의 장식물일 때 가치가 있는 법이기에... 인생의 성숙함을 기반으로 하는 중장년의 장식물이 되기에는 이 리토스토는 버거운 것, 자칫하면 유치한 것이거나 혹은 치명적인 것으로 변질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리토스트를 알고 경험한 사람만이 이런 경계를 잘 넘나들지 않을까 싶다.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사랑을 시작하거나 끝내기 좋은 계절이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는 리토스트가 시작되는 날이거나 혹은 종결되는 날인 셈이다.
설령,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할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라면 미숙한 청춘의 장식물인 리토스트를 내려놓고 충만한 사랑의 감정들로 채우는 건 어떨지 싶다. 혹여,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예정이라면 시련의 비참함, 즉 리토스트를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각오로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삶이 주는 가볍지만 쓰디쓴 리토스토를 안주삼아 와인 한 잔 기울이는 건 어떨는지. 물론 나를 위한 달콤한 초콜릿을 덤으로 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