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무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따로 또 같이 쓰는 첫 문장>
이제는 아무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아무도 탓하지 않기로 했다.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탓을 하느라 범죄 현장을 맴돌며 주변을 맴도는 짓을 더는 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은 이 말을 쓰는 지금도 흔들린다. 나는 누구보다도 철저히 '내 탓'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남 탓을 잘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나 때문이야. 또 내가 잘못해 버렸어. 난 왜 이 모양이지...' 즉결심판으로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논리나 증거 따위 필요 없다. 내게 일어난 일이니, 문제투성이인 내가 뭔가 잘못한 게 틀림없다. 이것은 오랜 시간 굳건하게 구축해 온 나만의 위기 분석 회로다.
문제나 위기가 닥치면 해결에 앞서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설명이 돼야 같은 일이 닥치지 않을 것 같았다. 시대의 흐름? 인간관계의 변수? 다른 사람의 사정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 따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알기도 어렵고, 다 알 수도 없다.
언제나 만만한 건 나였다. 나를 탓하면 모든 정황이 납득된다. 빠르고 쉽다. 세상 편하다. 복잡한 문제가 참으로 명쾌하게 단번에 풀린다. 내 탓은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 훌륭한 만능풀이법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취약점이나 결점을 나는 누구보다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것들에 문제들을 하나씩 끼워 맞추면 잘못들은 완벽하게 내 탓으로 귀결된다. 누군가가 나와 거리를 두면 ‘내가 눈치 없이 말을 잘못했나? 기분 상했나?’ 결론 내리면 된다. 일을 하다 실수하면, ‘역시 난 야무지지 못해. 어쩜 이렇게 쉬운 일도 제대로 기억 못 하고 틀리지.'결점과 연결해 이유를 조립하면 모든 설명이 한 줄로 정리된다. "이건 내 탓이다."
그렇게 단번에 심판해 스스로를 처벌하면 끝이 난다. 다음에는 잘해보자 애쓰지만, 신기하게도 내 탓이 되는 상황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면 늘 그랬듯 또 내 탓을 하며 나를 궁지로 몰고 간다. 익숙해진다. 둔감해진다. 그렇게 내가 아는 나는 언제나 잘못만 하는 나쁜 인간이 됐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가치나 노력해서 애써 쌓아 온 장점들은 깡그리 잊은 지 오래다. 내가 가진 거라면 누구든 가질 수 있는 별거 아닌 거다. 내 것에 큰 의미가 있을 리 없다. 내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내 탓을 하느라 범죄 현장을 맴돌며 주변을 맴도는 짓을 평생 반복해 왔다. 범죄 현장은 나의 일상이었고, 나는 그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숙한 용의자였다.
바보 같다고? 너무 자신을 몰아붙였다고? 맞다. 그런데 몰랐다. 내가 이렇게 멍청한 짓을 내내 되풀이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이 무한의 반복은 끝이 없었다. 사실 지긋지긋했다. 더 나아지지도 않으면서 나는 왜 나를 갉아먹었던가. 언제부턴가 뭔가 잘못됐단 걸 감지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강의 영상을 찾아 듣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소화하지도 못할 많은 정보를 꾸역꾸역 집어삼키며 발버둥 쳤다. 더뎠지만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탓을 하는 동안 책임을 회피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한계를 지녔다는 것을, 탓은 결국 그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는 건 잘못을 무시하거나 용납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배울 것을 배우고, 다음 단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는 것이다.
사실 안다. 나는 앞으로도 여전히 내 탓을 하면서 살 것이다. 그런 자세를 깨끗이 다 버리고 싶지도 않다. 남 탓보다는 그래도 내 탓을 더 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소망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사람이고 싶다. 나를 탓하는 일에는 분명 아픔이 섞여 있겠지만 지금보다 더 큰 책임을 질 만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지 않다. 탓을 하며 책임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끈히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나를 함부로 탓하지 않겠다.
길들여온 이 오래된 "내 탓 회로"를 완전히 끊어낼 순 없을지라도 들여다보고, 이름 붙이고, 때로는 벗어나려 애쓰는 나라면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다. 덮어씌우고, 갈아엎어 업그레이드된 배선을 만들어내 언젠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건 내 탓이었다.
그리고, 내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