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동구 우리 동구
22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소설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알고 보니 굉장히 알려진 소설로 《설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등을 쓰신 심윤경 작가님의 무려 데뷔작이다. (!!!)
1977~1981년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같은 역사적 사건이 등장한다. 소년 동구의 시선으로 가족과 성장을 그렸다.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전하는 괴팍하기 그지없는 최대 빌런 할머니. 살림꾼 어머니. 어머니에게 손찌검까지 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집안의 장손이지만 말도 글도 느려 멍청하다고 할머니께 구박 당하는 주인공 동구. 6살 터울의 영특한 여동생 영주.
영주를 업고 있으면 그 아이가 꼼지락거리는 작은 파문이 내 등의 울퉁불퉁한 갈비뼈와 척추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동생이라는 존재는 꼬물거리기만 해도 신기하고 흐뭇했다.
28면
동구에게 동생 영주는 그저 빛이었다. 꼬물거리는 단순한 동작에서 등 감각으로 존재의 가치를 전하는 작가님의 시선에 100% 공감했다.
'그래, 맞아. 살아서 꼼지락거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귀하구나. 나도 소중한 사람이었어.' 나의 존재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그럼 네가 야단을 맞잖아."
"예. 하지만 저는 크잖아요.
영주는 아직 어리니까요.
제가 야단맞는 게 나아요.
영주가 혼나는 모습을 못 보겠어요.
엄마랑 아버지도 많이 속상해하실 거예요."
117면
동구는 이런 아이다.
허구한 날 혼나고 맞는 건 자기 하나면 된다. 동생이 잘못한 일을 자기가 했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영주를 끔찍하게 아낀다. 가족을 위한다.
인내와 헌신을 특기로 가진 3학년 아이라니, 대견하기보다는 안쓰럽고 아팠다. 끙끙거리며 혼자 앓고 말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무도 그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건만, 동구나 나나 왜 그렇게 살았을까.
심윤경 작가님의 팬이 되었다.
첫 작품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모든 생을 거신 것만 같았다. 수려한 문장들이 여기저기 화살처럼 꽂히고, 꽃향기처럼 깔려서 정신이 아득했다. 어렵지는 않지만 쉽게 쓰지 않는 단어들이 담백하고도 화려하게 수놓인 향연이었다. 이런 일화를 어떻게 지으셨을까, 분명히 실화일 거야! 내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읽었다.
"나는 입으로는 앙앙 울고 귀로는 엄마가 내 엉덩이를 치는 철썩철썩 소리를 들으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는 미풍에 실려 긴 대각선으로 내 눈앞을 지나가던 벚꽃잎 하나를 가만히 쫓고 있었다. 꽃잎은 매끄럽지 않은 사선을 그리며 한들한들 바닥까지 내려와 마당 모퉁이를 두르고 있던 버드나무의 흰 솜털과 노란 송홧가루의 품속으로 파고들더니 오랜 동무라도 만난 듯 함께 구르고, 튀어 오르고, 아장거리다가 마침내 내 시야를 벗어났다. 모처럼 유람을 떠나는 아씨마님들처럼 유유하고 평안한 모습이었다. 엉덩이에 감겨드는 맵짠 매질의 아픔은 기억나지 않는데 투명한 햇살, 눈앞이 허물어질 듯 아물거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초라하지 않게 추락하던 그 꽃잎의 기억만은 어찌 그리 선명한 것일까."
22면
그렇다고 진지하기만 한 이야기도 아니다. 촘촘하고 정갈하면서도 조금씩 스토리를 비트는 사이에서 유머가 튀어 오른다. 작가님과 유머 코드까지 맞았다. 혼자서는 소리 내어 웃을 일이 없는 내가 큭큭거리며 웃으니 딸아이가 왜 그러냐고 묻는다.
"이 골목은 우리 옆 마을에 사는 덩치 큰 주리 삼촌의 떡 벌어진 어깨보다 약간 넓은 정도이기 때문에, 주리 삼촌이 가끔 약수터에 운동하러 다니느라 지나가면 그의 저고리 양쪽 소매가 벽에 닿아 소매에서 떨어져 나온 실밥이 벽에 나풀나풀 묻곤 했다. 만일 누군가가 이 골목에서 주리 삼촌과 마주친다면 두 사람은 벽에 등을 대고 서로의 배를 힘차게 비비면서 엇갈려 가야 한다."
19면
(아리따운 박은영 선생님을 처음 뵙고 같이 돌아가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삼촌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다정다감한 얼굴로 킁킁거렸고 내 뒤통수도 두어 번 쓰다듬었다. 모퉁이 집 시멘트 담에 소담하게 걸쳐 늘어진 포도덩굴 그늘에서 참새 한 마리가 새파란 포도알을 찍다가 우리의 발소리에 놀라 포로롱 날아가자 우스운 일도 아닌데 으허허 웃기도 했다."
242면
나눌 이야기가 끝도 없이 발견되는 책이다. 북받치는 감정을 꾹꾹 다스리고, 닦을 새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과 반짝이는 눈망울들을 보며 문학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오늘 모인 분들과 다시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모임을 해도 또 울고 웃으며 한참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동구는 내게 유년 시절의 고통이자 순하고 단단한 강인함이다. 작가님이 말씀하셨듯 나도 "힘들고 용기를 잃을 때면 동구를 생각"할 것 같다. 어디선가 행복한 트럭 운전사로 전국 곳곳을 돌고 있을 동구를 마음 한 편의 따뜻한 방에 들이고 종종 함께하고 싶다. 그러다보면 나도 얼마쯤은 동구를 닮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