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웃는 게 가장 빠른 마침표였으니까.
걱정처럼 들렸고,
위로처럼 시작했고,
대화용 문장처럼 가볍게 던져졌지만
이상하게 마음에는 오래 남았다.
그 말에는 질문이 없었다.
“힘들어요?”도 아니고
“어때요?”도 아니었다.
이미 결론이 정해진 문장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내 인생이 갑자기 비좁아졌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니었다.
선택지가 줄었을 거라는 추측,
조건이 생겼다는 평가,
조심스러워야 할 존재가 되었다는 시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이후로
결혼이 어려워졌다고 느낀 적은 없다.
다만
아무 결혼이나 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아이가 생기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말투 하나,
태도 하나,
위기 앞에서의 선택 하나가
이 사람과 내 아이가
같은 공간에 있어도 되는지를
자동으로 걸러낸다.
그래서 나는 요즘
누군가를 만날 때
설렘보다 먼저 기준이 선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말한다.
“눈이 너무 높아진 거 아니에요?”
아니다.
눈이 높아진 게 아니라
인생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된 것이다.
“아이가 있어서 힘들겠다”는 말은
사실 이런 번역에 가깝다.
당신은 이제
타협해야 할 이유가 생겼겠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 때문에
인생의 다음 장이
‘참고 사는 이야기’가 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아이 덕분에
오히려
더는 아무 장면에나
나를 끼워 넣지 않게 됐다.
결혼이 어려워진 게 아니라
기준 없는 결혼이 어려워진 것이다.
아이가 조건이 된 게 아니라
아이 덕분에
기준이 생겼다.
그 차이를
굳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설명하는 순간
또 누군가는
“그래도 현실은 그렇잖아요”라고 말할 테니까.
그래서 요즘의 나는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웃지도 않고,
반박도 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속으로 한 번 번역해 본다.
아, 이 사람은
아직 자기 인생을
아무한테나 내주고 있구나.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인생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인생이 정확해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결혼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결혼이나 안 하는 사람으로
하루를 산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예의 있는 선택이니까.
그 말,
이렇게 이해하면 될까요?
—그릿 G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