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던 이유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나 예의상.
말투는 부드러웠고,
표정에는 나름의 걱정이 담겨 있었다.
아마도 위로였을 것이다.
상황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주고 싶은 마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위로 중 하나였겠지.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 말이 지나가도록 두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이 지나간 뒤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식었다.
아이를 잃지 않았으니
모든 상실을 견딜 수 있을 거라는 전제.
아이 덕분에
슬퍼할 이유가 조금은
줄어들었을 거라는 암묵적인 계산.
그 말 속에는
내가 잃은 사람의 자리가 없었다.
그가 사라진 이후의 밤들,
아이를 안고 혼자 견뎌야 했던 공포,
아무도 대신 서줄 수 없었던 순간들은
모두 “그래도”라는 말 뒤로 밀려났다.
아이를 가진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동시에 더 많은 책임이기도 하다.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고,
무너지고 싶을 때 무너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
나는 아이 덕분에
살아냈지만,
아이 때문에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강함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선택지가 없었던 결과였다.
그럼에도
마치 내가 이 정도의 고통은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상황을 정리해 버린다.
그 말은
이런 뜻에 더 가까웠다.
“당신은 이제
아파할 이유가 조금 줄었으니
조금 더 버텨도 되겠네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잃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 둘은
같은 가슴 안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숨 쉰다.
괜찮게 만들려는 말보다,
빨리 단단해지라고 요구하는 말보다,
그저
“그 말, 참 힘들었겠다”라고
함께 앉아주는 일.
그래서 나는
이제 그 말 앞에서
웃지 않기로 했다.
대신 속으로
조용히 다시 번역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