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끝났는데 마음은 아직 사용 중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빨리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결심,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
문장을 만들고, 마침표를 찍고,
“이제 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감정은
항상 그다음에 온다.
버스 창에 비친 표정 하나,
편의점에서 집어든 익숙한 음료,
어디선가 스친 향 같은 것들.
그럴 때 나는 가끔
내가 아직도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아직
끝난 장면을 정리 중이라는 걸 안다.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요즘은 조금 배우고 있다.
관계는 종료되었는데
마음은 그 소식을 늦게 받는다.
그래서 어떤 날은
괜찮다가도 갑자기 무너지고,
어떤 날은
무너지다가도 또 멀쩡해진다.
사람들은 그걸 두고
“정리 안 됐네”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정리가 안 된 게 아니라
정리라는 단어가
감정을 너무 쉽게 만들기 때문이다.
처음엔 숨을 막히게 하던 것이
나중엔 가끔 생각나는 정도로,
또 나중엔
생각나도 나를 끌고 가는 힘이 줄어든다.
그 과정이
바로 ‘남아 있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하나로만 남아 있지도 않다.
그리움만 남는 게 아니라
서운함도 남고,
고마움도 남고,
화도 남고,
미안함도 남고,
때로는
“내가 왜 그랬지”라는 후회까지 남는다.
문제는
그 잔향이 남아 있을 때
우리가 자꾸 스스로를 몰아붙인다는 거다.
“왜 아직 이래?”
“왜 이렇게 오래가?”
“나는 왜 이렇게 미련하지?”
하지만 나는 요즘
그 질문을 조금 바꿔보려고 한다.
“아직 남아 있구나.”
“아직도 아프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게 말해주는 순간,
감정은 조금 덜 날카로워진다.
나를 찌르던 것들이
나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사랑이 끝나도 감정이 남는 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진심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만이
진심의 후유증을 겪는다.
그래서 나는
남아 있는 감정을
없애려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 생활 안에서
조용히 제자리를 만들어주기로 한다.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오늘의 나까지 무너뜨리지는 않기로.
사랑은 끝났지만
내 하루는 계속되니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감정이 남아 있는 동안에도
삶은 계속 흘러간다는 걸.
그리고 그게
가끔은 잔인하지만,
또 가끔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이 되어 준다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정이 남아 있는 나를
억지로 밀어내지 않는다.
오늘이 무거우면 무거운 채로,
오늘이 괜찮으면 괜찮은 채로.
그렇게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계속 살아지는 날을 향해
조금씩 걷는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이 말을 남기고 싶다.
오늘도,
혼자서 마음을 견디는 당신 옆에
조용히 앉아 함께 울어줄게요.
— 그릿 Gr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