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졌다는 말 이후에 남은 사람의 태도에 대하여
“그래도 그때보단 나아졌잖아요.”
그 말을 몇번 듣고 나면
사람은 조금씩 달라 진다.
말을 조심하게 되고
표정을 관리하게 되고
감정을 바로 꺼내지 않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면
먼저 계산한다.
지금 이 감정은 과한가.
이제는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되는 단계인가.
예전 같았으면
아프다고 말했을 순간에
나는 대신 침묵을 고른다.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나아졌잖아요”라는 말은
감정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대신 조건을 붙인다.
이 정도까지만 허용되는 슬픔,
이 정도 선에서 멈춰야 하는 눈물.
그 선을 넘는 순간
사람은 다시
‘이상한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울고 싶은 날에도
한 박자 늦춘다.
이 감정이
‘이미 나아진 사람답지 않은지’
먼저 계산해본다.
괜히 울었다가
“아직도?”라는 눈빛을
마주치게 될까 봐.
그리고 나는 요즘
그 선택을 너무 자주
‘참는 쪽’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안다.
울지 않는 내가
정말 단단해진 건지,
아니면
울 수 있는 권리를
조용히 내려놓은 건지
가끔 헷갈린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안심한다.
울지 않으면 괜찮아진 거고,
웃으면 다 지난 일 같고,
아무 말 없으면
이제 괜찮은 사람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마음은
그 분류표를 따르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남아 있고,
참아낸 눈물은
사라지지 않고 쌓인다.
그런데 “나아졌잖아요”라는 말은
그 과정을 건너뛴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결론을 먼저 내려버린다.
이제는 괜찮아야 할 사람.
이제는 울면 안 될 사람.
그래서 회복의 중간쯤에 서 있는 사람들은
가장 많이 혼자가 된다.
아프다고 말하기엔
이미 나아진 사람 같고,
괜찮다고 말하기엔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그 어정쩡한 지점에서
사람은
자기 감정을 스스로 검열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요즘
그 사실을 자주 떠올린다.
울지 않는 내가
강해진 건지,
아니면
울어도 되는 권리를
조용히 반납한 건지.
이제
그 검열을 조금 내려놓으려고 한다.
울고 싶은 날에
울어도 되는 사람으로
나를 다시 분류하려고 한다.
그래서 오늘도
그 말 앞에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조용히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