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가던 날

딸에서 엄마로 넘어가던 문턱

by 그릿 grit

짐은 많지 않았다.
옷 몇 벌,
자주 메던 가방 하나,
그리고 아직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한
내 삶의 방향.
짐을 싸면서도
이게 정말 떠나는 건지
잠깐 나갔다 오는 건지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다.

엄마는 그날
유난히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그 옷 말고 다른 거 입어라.”
“날씨 쌀쌀한데 겉옷 챙겨.”
그런 말을 몇 번은 했을 텐데
그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지만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
화가 나서라기보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닫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뒤돌아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뒤돌아보면
다시 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는데
손이 이상하게 느려졌다.
여기서 자란 시간이
갑자기 발목을 붙잡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 넘어질까 봐
엄마가 잡아주던 손,
아빠가 사다 주던 운동화,
그런 기억들이
현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 같았다.
“가볼게.”
그 말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엄마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고
아빠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남았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바깥공기가
생각보다 차가웠다.
집 앞 골목에
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았고
미래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골목을 몇 걸음 지나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집을 나온다는 건
문 하나를 나서는 일이 아니라
한 시절을 뒤에 두는 일이라는 걸.
그날
나는 딸이었고
곧 엄마가 될 사람이었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그 문을 나서던 순간부터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집을 나선 건 한 걸음이었지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그 뒤에서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